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정숙자 바람이 조용하고 맑은 햇빛을 동그란 탁자 위에 놓고 갑니다. 저는 이 꽃다운 편지를 마저 읽지 못하고 당신께 갑니다. 당신의 초대에 늦을까 봐 서둘러 눈을 감고 지름길로 ᄀᆞᆸ니다. 당신은 사원이나 궁중에 아니 계시고 무한한 대기 중에, 공기 중에 계십니다. 당신께서 초대하신 장소는 언제나 제 마음속 가장 깊고 조용한 골ᄍᆞ기임을 외웠기 때문입니다. (1990. 9. 20.) 방금 samsung man이 다녀갔습니다. 냉장고 야채박스 밑에 자꾸만 얼음이 깔리기 때문이었어요. 거뜬히 A/S를 마친 뒤 그는 뭐 더 불편한 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기를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 20년은 족히 넘었을 소형 분쇄기를 꺼냈습니다. 바쁠 텐데도 그는 분쇄기를 해체/조립했습니다...

미신/ 신용목

미신 신용목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 유령 역할을 맡은 배우는 자신의 육체를 없애야 했지. 멕베스를 연기하는 자가 멕베스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유령을 연기하는 자는 죽어야 했다. 그의 연기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무대의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이에 그는 관객들의 생각 속에 무대를 차리고 대사를 쳤다 생각 속에서 연기를 했다. 지문으로 가득 찬 세계가 생각 속에 펼쳐지고 생각이 무대가 된 관객들은 아무도 극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 속에서 울고 생각 속에서 웃고 생각 속에서 소스라치느라 낮과 밤을 나누지 못했다. 그들의 삶이 모두 연극인 줄 몰랐다. 유령이 그들의 생각인 줄 몰랐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잊었다. 하나의 이야기에 가려져 다른 이야기가 ..

정초 생각/ 곽진구

정초 생각 곽진구 누가 봐도 잘 될 리 없는 상황이지만 모든 게 잘 될 거라며 당신이 왔다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귀를 둥글게 말은 쥐토끼처럼 귀를 둥글게 말은 당신은 정월 초하루 내 집 마당에 발을 내려놓으며 선몽善夢을 복조리에 담아 방문 앞에 걸어 놓는다 선단仙丹을 주는 것이리라, 적어도 나에겐 그래서 나는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꿀 것이다 겨드랑이가 가려울 것이다 아마도 하늘을 날아봐, 날아봐,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허무맹랑한 날개가 만져질 것이다 허망하게 들릴지 몰라도 하늘로 뛰어올라 별들 사이를 무장무장 유영할 것이다 당분간 지구론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곳에서 소리소문 없이 살 것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당신이 계신 별로 사라질 것이다, 것이다 문득 큰절 올리는 조상님 앞에서 별안간 -전문..

지구가 나보다 먼저 가고 있다/ 홍철기

지구가 나보다 먼저 가고 있다 홍철기 걸을 때마다 물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내 귀에는 물이 흘러요 아, 나는 물방울이에요 따로 움직이는 몸짓은 눈에 잘 띄어서 그날 밤 짧은 다리로 뒤척이는 걸 알았어요 다르다는 이유로 일생이 흔들렸던 사람 알고 있어요 나는 지금 물처럼 걷는 연습을 하고 세상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고 있죠 건널목 앞에서 절룩이던 시간은 어떤 색이었을까요 오늘, 말없이 가다 마주친 사거리에서 듣지 못한 말들이 아는 척을 해요 다리가 길어지면 긴 꿈을 꿀 수 있을 텐데 넘어지지 않게 붙들고 싶은 하루가 튀어나와 붙잡아 준다면 가능할까요 씩씩하게 내딛는 걸음에 내일은 물이 넘치는 소리로 가득할 거예요 늘 궁금했어요 나는 왜 지구보다 늦게 가고 있는 걸까요 -전문- (p. 111) 시작 ..

아버지의 자전거/ 유정남

아버지의 자전거 유정남 명덕상회 짐자전거는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전거였다 석탑 모양으로 쌓아올린 연탄이나 쌀자루를 싣고 구름의 언덕을 오르내렸다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그란 소리를 기다리며 나는 자랐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온 동네 아낙들의 왁자한 웃음이 몰려가 천장에 매달린 삼십 촉 백열들이 상점을 지키는 밤이면 아버지는 방바닥에 사탕을 늘어놓고 어린 딸에게 산수를 가르쳤다 가끔은 물감 향 번지는 스케치북 속을 함께 달리기도 했다 힘센 짐자전거가 때론 울기도 한다는 비밀을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한번 녹이 나기 시작한 체인은 자꾸만 궤도를 거부하고 바람의 소리로 일구어낸 집 문패 밑에서 빠르게 부식되어 갔다 사시사철 땀을 굴리는 아버지는 연등 같은 꽃상여에 눕고 뼈대만 남은 자전거는 고물장..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문태준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문태준 오래 묵은 이곳에서는 흙을 들출 때마다 지렁이가 나왔다 문 열고 나오듯이 나와 굼틀거렸다 나는 돌 아래 살던 지렁이는 돌 아래로 돌려보냈다 모란꽃 아래 살던 지렁이는 모란꽃 아래에 묻어주었다 감나무 아래 살던 지렁이는 감나무 뿌리 쪽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호우가 쏟아지고 내가 돌려보냈던 지렁이들이 다시 흙 위로 나왔을 때에도 이런 곳 저런 곳에, 살던 곳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고 온 내 고향이 눈에 선했다 집터와 화단의 채송화, 우물, 저녁 부엌과 둥근 상, 초와 성냥, 산등성이와 소쩍새가 흙속에 있었다 어질고 마음씨 고운 고모들도 흙속에 살고 있었다 솟아오르려는 빛이 잠겨 있는 수돗물처럼 괴어 있었다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있었다 -전문(p. 144) -..

호모 마스쿠스/ 강명수

호모 마스쿠스 강명수 몸살 앓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온다 감 이마에 발갛게 열이 오른다 식은땀 흘리는 꽃무릇 온몸에 발진이 돋는 석류 재채기 콧물 흘리는 옥잠화 으스스 떨며 나팔꽃이 창문을 닫는다 끙끙, 한바탕 휘젓고 가는 신음처방전엔 햇살 감기약 먹고 한 사나흘 앓고 나면 거뜬하게 일어날 거라고 주르륵 쏟았던 빗줄기 감아올린다 그렇게 한나절 지나는가 싶었다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이 들어온 바이러스 자객의 칼 앞에 울안의 천리향이 늘어지고 동백 모가지가 뚝뚝 떨어지고 수선화가 노랗게 질려 오그라질 때 게릴라전을 벌이며 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날마다 스마트폰에는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밀폐된 공간에 모임 삼가기 사회적 거리 두기 안내 문자가 꽃눈처럼 날아든다 검은 공포심이 지피에스처럼 따라다니고 ..

황치복_개성적인 작시술, 혹은···(발췌)/ 녹슨 천사의 트럼펫 : 김정범

녹슨 천사의 트럼펫 김정범 어느 행성의 버려진 공포인가 푸르른 향기는 지워졌다 붉은 숲에 바람이 일고, 빛에 그을린 삭정이가 어지럽게 떨어진다 귀가 잘린 잿빛 고양이는 가시덤불에 몸을 숨기고, 굶주린 늑대의 꼬리에서 파란 가루가 번득인다 찢어진 눈으로 짐승을 쫓고 있는 팔 없는 인형 하늘에서 녹슨 천사가 트럼펫을 들고 어둠을 벗기며 음관을 연다 하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갈라졌네 깨진 조각이 얼굴에 박히고 방열판이 녹아내렸네 허공에서 신의 말이 번쩍거렸네 램프의 빛을 따라 실험지가 흩날리고 해골 구름이 입을 열었네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숲을 적시는 이지러진 소리 방사선의 밤 위로 연둣빛 야광 음이 흐른다 그녀는 옷을 벗는다 자라난 발톱이 흙에 뿌리를 내리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수직의 안테나를 세..

황사랑_어둠을 통과하는 시(발췌)/ 반복적인 밤의 무늬 : 문은성

반복적인 밤의 무늬 문은성 얼마나 큰 괴로움으로 죽은 자를 기억하는가 두 손을 간절히 쥔 채 땅속에 고개 파묻고 가장 두려운 기도를 올리게 될까 눈물을 씻고 세수를 하고 늦은 저녁을 먹은 후 가장 낮고 괴로운 잠자리에 누워서조차 살고 싶다는 역설적인 욕망을 개발했을까 아침에는 그 욕망에 대한 크고 무한한 좌절과 반복적인 호흡곤란의 공포 섞인 눈물을 개발했을까, 얼마나 얼마나 죽기 싫으면 도리어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 충동을 개발하고 자기 온몸을 부드럽고 물컹한 죽음의 피부 속에 푹, 찔러 넣는 긴 칼로 만들었을까 밥을 먹고 약을 삼키고 사랑을 나누며 점점 삶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그 깊은 죽음의 살점 속에 자기 온몸을 푹 푹 찔러 넣으며 그 속으로 깊이, 더 깊이 하강하게 될까 마구 내려앉게 될까 솟아오르..

노대원_어린-어른, 혹은 성숙한···(발췌)/ 시의 신이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쓴 시 : 이우성▼

시의 신이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쓴 시▼ 이우성 너는 이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써서도 안 될 것이며 쓴다고 하더라도 그럴듯한 문장은 결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시의 신이 말했다 꿈에서 나는 울었다 시인이니까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나는 너를 떠날 것이다 그 순간 화가 났다 그동안 내 옆에 있었는데 시가 이 모양이었어? 가라,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있으나 마나 시의 신 잠에서 깼다 아치피 시 써서 성공하기는 글렀어 혼잣말하며 부러운 시인들 몇 명을 떠올렸다 시를 쓰려고 소파에 앉았는데 정말 아무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런 시마저 이제 무리인가 어이가 없네 일어나서 청소를 했다 삶을 지우려고 괜히 막 말했어 그래도 신인데 나는 성공한 시를 쓴 적이 없다 눈물이 났다 시를 사랑하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