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고구마가 주식이었던  내 유년의 겨울은 참 길었다  눈도 많이 내렸으며  처마 밑 고드름은  땅까지 길게 늘어졌다   먹을 것이 풍부한 지금은  겨울이 하루처럼 지나간다  눈도 내렸다 금방 녹아내리고  처마 밑 고드름은 보이지 않는다   해진 옷과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고  눈 내린 조그만 골목길을  검정 고무신으로 내달리던 날들도   호호 언 손을 입에 불다가  겨드랑이 사이로 집어넣기도 하고  처마 밑 고드름 뚝 따내어  입에 넣고 쪽쪽 빨기도 했던 그날들은  이제 없다 그 찬란했던 겨울은   겨울은 겨울답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는데   이제 그 겨울도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이제는 떠나고 없다   서산에 긴 그림자만 장승 되어 서 있을 뿐이다    -전문(..

홍용희_민중 변혁 운동의 전통과 우주 생명의 지평(부분)/ 황톳길 : 김지하

황톳길     김지하(1941-2022, 81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

문상/ 이재무

문상         김지하 선생님에게     이재무    오월은 연초록 광휘로 번뜩이고  내 마음은 회색빛 우울로 가득하다  야생마처럼 질주하다가  사자처럼 울부짖다가  기운 다해 쓰러져  과거가 된 사람을,  저항에서 생명으로  전환한 시와 사상 때문에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한국의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대의 불운한 사상가를,  이제는 생전에 그가 남긴 음성과 글을 통해 만나야 하리  바다는 벼랑에 부딪혀 깨어지는  물의 파편에 대하여 아무런 감정이 없다  실재 속 한 개체일 뿐인 인간은  누구도 주어진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맨몸에 걸치는 비단조차  아플 것처럼 눈부신 햇살이 불편하다  오는 길 혼자였듯  가는 길 혼자인 이를  배웅하러 문상 간다     -전문(p. 36-37)   ---..

김성희_미니멀라이프, 버리고 갈 것만 남은···(부분)/ 참새들의 수다 : 이길원

참새들의 수다      이길원    방앗간 뒤적이는 참새들   뒤로 하고 전깃줄에 오른다  하나둘 모이는 참새 친구들  - 아침 햇살이 따뜻하지?  - 햇살 먹은 저 구름 좀 봐  - 영롱한 저 빛깔  - 어젯밤 별빛으로 시 한 수 옮겼지  서로 어깨 비비며 펼치는 수다  날갯죽지 퍼덕이며  배고픔도 잊은 듯 키득거린다  소소한 행복   무리 중 한 마리  푸드덕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또 한 마리  뒤따라 사라진다  다른 한 마리 몸을 들썩인다  - 어디 가려고?  - 저 안개 속. 천국인가 봐  - 먼저 간 친구들이 안 돌아오는 걸 보면  - 모두 가면 어쩐다니  - 누가 내 수다 들어 주니  친구 잃은 참새 몇 마리  허전이 남아 지저거린다*      -전문-    * 지저거린다: 소리내어 자..

황정산_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찾다(부분)/ 아프다 : 서철수

아프다     서철수    아프다  갈비뼈를 다 드러낸 것처럼 매우 아프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모래를 한 움큼 집어먹은 것처럼  핏덩이를 한 움큼 토하는 것처럼  많이 아프다.   비를 앞세워 비겁한 걸음을 했던 계절이  이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석양이 깊게 들어오는 뜰에  실루엣만 남기고 있는 감나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빗소리  이 숨 가쁜 계절에  아프다     -전문-   ▶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찾다(부분)_황정산/ 시인 · 문학평론가  시인은 제목까지 해서 "아프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그만큼 고통이 가슴 깊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의 아픔은 늦가을에 "실루엣만 남기고 있는 감나무"라는 다른 존재로 인해서이다. 시인은..

빈속_한때의 것에게 보내는 인사(부분)/ 꽃의 귀향 : 김윤배

꽃의 귀향      김윤배    *  불룩해진 욕망으로 꽃의 귀향이 이루어진다   지상에 색색의 그림자를 남기고 돌아간 꽃의 영혼을 위해 슬픈 노래를 부른다   돌아가던 꽃이 뒤돌아보며 슬퍼하지 말라고, 다시 찾아올 거라고 위로한다   꽃의 말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내년이면 얼마나 먼가   그 먼 날을 기다릴 수 있을까   어둠 속에 꽃을 그리며 소리 없이 운다   눈물이 어둠 속의 꽃으로 핀다   꽃은 끝내 내게로 귀향할 것이다   *  수 없는 꽃 무덤을 꽃으로 가꾼다    -전문-   ▶ 한때의 것에 보내는 인사(부분)_빈속/ 고려대 교양교육원 강사  "어둠 속에 꽃을 그리며 소리 없이 운다"에서 '어둠'은 '마음의 어둠'을 의미한다. "눈물이 어둠 속의 꽃으로 핀다"에서 '꽃'은 시詩를 의미한..

숨/ 진란

中     숨     진란    미운 사람 없기, 지나치게 그리운 것도  없기, 너무 오래 서운해하지 말기, 내 잣대로 타인을 재지 말기, 흑백논리로 선을 그어놓지 말기, 게으름 피우지 말고 걷기, 사람에 대하여 넘치지 말기, 내 것이 아닌 걸 바라지 말기, 얼굴에 검정색깔 올려놓지 말기, 미움의 가시랭이 뽑아서 부숴버리기, 그냥 예뻐하고 좋아해 주고 사랑하기, 한없이 착하고 순해지기   바람과 햇볕이 좋은 날 자주 걸을 것  마른 꽃에 슬어 논 햇살의 냄새를 맡을 것  그립다고 혼자 돌아서 울지는 말 것  삽상한 바람 일렁일 때 누군가에게 풍경 하나 보내줄 것  잘 있다고 카톡 몇 줄 보낼 것  늦은 비에 홀로 젖지 말 것  적막의 깃을 세우고 오래 걸을 것    -전문(p. 145)/ 수상시집 『슬픈..

별의 방향을 읽다/ 이현서

中     별의 방향을 읽다     이현서    검푸른 밤하늘, 모래를 뿌린 듯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꿈이었다 선명한  푸른 별빛이 발아래로 쏟아졌다   빠르게 이동하는 별자리들  음계를 버린 지 오래인 나의 노래가 더듬거리며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던 전생을 빌려와  별의 방향을 읽고 있다   어떤 영혼의 간절함이 별을 낳았을까  별 속에도 바람이 살고 있을까  눈먼 새가 울고 있을까   내 안의 습지에서  천 년의 시간을 만지작거리던 바람이 피워내던  구름 꽃의 비밀이 풀릴 것만 같은 머나먼 행성   역류하는 꿈속  당신이 두고 간 계절 사이  붉은 패랭이꽃 속으로 들어간 빼곡한 울음들이  가까스로 파란 정맥을 타고 흐른다   일억 광년의 거리만큼 아득한 존재와 부재의 거리에서  부르면 목이 메이는 ..

복권명당/ 김자희

복권명당      김자희    잠실역 8번 출구  꼬리가 보이지 않는 줄 서기   민망한 시선은 서로를 외면한다  지남철에 나사못 달라붙듯 날마다 자라나는 대열  지친 얼굴 얼굴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스며드는 한기에 온몸이 떨려온다  머플러로 목을 감싼다   샛강의 모래톱 같은 이방지대 롯데캐슬 앞  저물어 가는 겨울비에 떨면서 그들은 무표정하게 서있다   오천 원 만 원권의 지폐들이 누군가의 입에 블랙홀같이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을 알면서 언젠가는 자신들의 입에도 블랙홀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오늘도 고독한 줄 서기를 하고 있다   123층 타워는 비밀의 성처럼 견고한 벽들로 최소한의 출구만 내어놓고 침묵한다   세상이 아파가고 있다   줄 서기 유혹에 마른침을 삼키며  나는 버..

보인다, 저만큼/ 김은

보인다, 저만큼     김은    낡은 문이 삐그덕거린다   노인 수도자를 엿본다   침묵으로 곡기를 채운 모습들  허기진 몰골 퀴퀴한 냄새  녹슨 쇠사슬의 껍질 같은 모습이다   밤을 멀리 쫓아버린  시간 속  말라버린  기억의 거죽처럼   그들은 고뇌의 알맹이로 퍼즐을 맞추고 있다     -전문(p. 96)  --------------------- * 『미네르바』 2024-봄(93)호  Ⅱ> 에서 * 김은/ 2018년 『미래시학』으로 등단, 시집『불면을 드로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