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브룩샤 아사나/ 정선희

브룩샤 아사나 정선희 그건 무의식 중에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옆에서 나는 소리인데 왜 내 가슴에 금이 가는 걸까 아야, 아야 소리를 내면서 견딜 수 있는 아픔이 있다 몸을 통해 마음의 통증이 빠져나오는 수가 있다 브룩샤 아사나 그녀가 한쪽 다리로 서서 두 손을 모아 머리 위로 쭉 폈을 때 촛불이 휘청,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거울 모서리에 있는 한 점을 노려보았다 생각이 끼어들면 점이 보이지 않아 점은 사라졌다가 두 개 세 개가 되었다 거울이 수면처럼 일그러지는 그때 발등에 떨어지는 촛농을 보았다 앗, 뜨거! 그녀 대신 내가 넘어졌다 -전문(p. 180)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정선희/ 2012년 『문학과의식』 시 부문 등단 & 2013년⟪강원일보⟫ 신춘문예..

등운곡(藤雲谷)/ 이명숙

등운곡藤雲谷 이명숙 이끼 묵묵한 부도탑 지나 대나무 숲을 헤치면 새벽종성 보라 빛 푸른 그늘 실개울 비스듬히 구름 위의 처마 끝 버들치 가볍게 받쳐 든 채 하루 종일 불어오는 풍경소리 너럭바위에서 오랫동안 잠이 들었다 간혹 계명암의 닭소리를 듣기도 했다 오월 눈부신 햇살은 눈물처럼 흘러 고여 골짜기 굽이 돌 때마다 발은 땅에 닿지 않고 늘 간당간당 절벽 끝에 서 있었다 달빛 그림자에 가슴 베이는 나날 주렁주렁 등꽃마다 불을 밝히고 초파일 밤을 지샐 때 홀로 듣는 바람의 살들 잊혀진 생각처럼 향수해香水海 어스름 닻을 내리면 삼배 마치고 일어서는 걸어다니는 절寺 한 채 수천 수만 삼매의 뿌리 더욱 질기다 -전문(p. 144-145) * 등운곡騰雲谷: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 국가 지정 문화재 ---------..

직박구리/ 박옥수

직박구리 박옥수 해저처럼 가라앉은 연말 하얀 눈발 내리던 그날 털실뭉치처럼 동그래한 배와 긴 꼬리를 가진 텃새가 갈고리 발로 베란다 난간을 휘감고 있다 무슨 연유로 내게 왔을까 시선은 늘 창가에 박혀있다 엄마의 혼령인 듯 잿빛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내 눈과 마주친다 경계를 넘어선 지도 오래인데 아직도 딸이 마음에 안 놓이는지 유리창너머로 내 맘을 꿰뚫으며 안부를 물어온다 엄마는 피난지에서 나를 낳고 삼일을 굶어 네게 빈 젖을 물렸다는 무수한 옛 이야기 달달한 걸 좋아했기에 찐 고구마를 잘라 창밖에 내어 놓는다 양식을 얻으려 새의 옷을 입고 우는 아우성인지 이제 마음이 놓여선지 식솔 하나를 달고 드나든다 새가 날아간 하얀 불곡산 너머로 내 눈길이 따라 간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산봉우리마다 고봉밥이..

서른아홉 살의 강물/ 전순영

서른아홉 살의 강물 전순영 '콩코르드' 광장 나무도 풀도 뛰어나와 박수치고 은하의 별들도 반짝 반짝 웃음을 보태주었다 서른아홉 살 손끝에서 쓸려나가는 임산부처럼 배가 부른 그들을 싹싹 쓸어버리는 그 눈빛에 두 손 번쩍 들고 꼬꾸라지는 카리스마는 국경을 넘는 바람이 배달하고 있다 깨진 밥그릇을 수리하고 휘어진 척추를 수리하고 햇볕과 에어컨을 불러와 땀과 냉기가 핏줄을 타고 함께 돌아가라고 등을 다독이며 가지런히 추켜들고 찰랑찰랑 차오른 무논에다 다시 심고 있다 뽕나무밭을 움켜쥐고 훌훌 털어낼 때 매달린 벌레들이 두 손을 비비는데 시들었던 뽕나무밭이 새파랗게 살아나고 있다 뽀얗게 흙먼지 뒤집어쓰고 길바닥에 뒹굴던 돌들이 바퀴 굴리며 달려 나오는데 지금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그들의 날개는..

말모이/ 이현실

말모이 이현실 을지로 3가 뒷골목 얽히고설킨 전깃줄 아래 하늘이 손수건만큼 보이는 골목 2층 삐걱대는 나무계단 위에 K씨의 말모이 공장이 있다 온종일 탈탈탈 폐지 실어 나르는 이륜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와 40년 함께 늙어가는 활자들 노안으로 흐려진 자판 위에 머리통만 한 볼록렌즈 바싹 들이대어 문장의 어긋난 뼈를 집어내고 가지런히 가다듬기도 하지 안구 건조증으로 침침한 눈 인공눈물 짜 넣으면서도 까끌까끌 모래알 같은 글자들 흩어진 말을 한자리에 모으지 모래바람 능선을 넘으면서 말들의 발자국을 그러모으는 낙타 한 마리 오늘도 구부정한 노구로 한 권의 책을 짓기 위해 닥나무 숲, 말모이 공장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전문(p. 160-161) * 말모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 시작노트> 인간의 삶을 바..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정숙자 창조 창작 자연 예술 태양 등불 태양도 때로는 눈물에 휠까? 피가 끓기도 할까? (1990. 10. 4.) ‘싶은’ 그것이 사라졌다. 더 갖고 싶은, 더 맺고 싶은, 더- 더- ‘더’가 ᄉᆞᄅᆞ졌다. 이런 게 정화인가? 승화인가? 순화인가? (요즘 빈번히 체감하는 악 중 악) (그로 인한 효과일까?) 소박한 말씨와 웃음들이 미래형으로 안착한다. 각인은 공간을 겸한 시간까지도 거기 고정시킨다. -전문(p. 67) ------------- * 『미래시학』 2024-봄(48)호 에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공검 & 굴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정숙자 그믐달에 줄 매어 공후로 탈까? 화살촉에 꽃 매겨 서편에 쏠까? 마음 없는 마음은 천지도 한 뼘 오르ᄅᆞᆨ내리ᄅᆞᆨ 먼먼 그네를 타네 (1990.10. 4.) 오래전 저 뒤뜰이 서리 낀 하늘이었군요 그 밤은 분명 협곡이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협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란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다만 수직/수평으로 한 올 한 올 ᄍᆞ보는 거였습니다. 아무리 가느다란 실일지라도 진실/진심을 부어보는 거, 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협곡의 삶,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캄캄히 진화 중입니다 -전문(p. 66) ------------- * 『미래시학』 2024-봄(48..

송현지_기르는 마음(발췌)/ 당근밭 걷기 : 안희연

당근밭 걷기 안희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暖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내가 머잖아 당근을 수확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

공중은 누구의 것인가/ 김령

공중은 누구의 것인가 김령 누군가 슬피 울고 있다 창밖에서 누군가 숨어서 울고 있다 우는 것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숨을 토하듯 울음을 토해내야 한다고 너는 말했다 제때 울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무엇을 시작해도 정해진 것처럼 내리막길만 걷는다 영업 중, 임대합니다, 라는 팻말을 동시에 내건 가게 어떤 결단은 칼로 자르듯 단호할 수가 없지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의 표정 아이의 표정도 애매할 때가 있다는 걸 아이일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몸이 사라진 체셔고양이의 웃음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길들, 모퉁이들 무논에 개구리들이 떼지어 울고 그 울음 끝을 먼 산의 올빼미가 따라 운다 우는 것들의 힘으로 초목이 자란다 -전문(p. 205-206) ---------..

처음 본 사람/ 정한아

처음 본 사람 정한아 입을 닫고 있을 때와 입을 열었을 때는 얼마나 다른지 인식과 판단을 오가면서 두려움과 사랑을 오가면서 인식을 죽이고 다시 판단을 죽이면서 흑백의 진공 총천연색의 어지러움 무수한 살해 속에 비로소 살아나는 숲 여전히 무언가 썩어가고 있을 테지만 내가 거기 묻힐 수도 있을 테지만 거기서 무섭고 슬픈 비밀을 노래하는 작은 새들 거기서 솟아나는 기름지고 향기로운 풀 -전문(p. 188)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정한아/ 경남 울산 출생, 2006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어른스런 입맞춤』『울프 노트』, 시산문집『왼손의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