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 박순원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 박순원 명실상부 명불허전 명실공히 유명무실 자타공인 명약관화 나는 박순원이다 실명도 필명도 예금주도 박순원이다 주민등록상으로도 호적상으로도 박순원이다 친구들은 나를 수너니 수너니 수너나 수너나 부른다 박순원 박수넌은 무엇과 어울릴까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어떻게 쓰일까 박순원 씨 박순원 님 박순원 귀하 박순원 대리 박순원 과장 부장 박순원 사장님 박순원 대표 박순원 선생님 박순원 작 박순원 곡 박순원 해설 박순원 감독 음악 박순원 음향 편집 박순원 행인3 박순원 박순원의원 박순원부동산 수너니논술학원 (주)박순원 (사)박순원 박순원재단 박순원뼈해장국 우거지등뼈해장국 박순원갈비탕 박순원족발 박순원생식 박순원 만세 박순원의 봄 박순원과 아이들 박순원의 시간 박순원 시대 수너니..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채상우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채상우 왜 그렇다잖아 사람이 말야 사람이 죽기 전에 말야 사람이 죽기 몇 분 전에 말야 자기가 살아온 한생을 통째로 기억한다잖아 낱낱이 되산다잖아 주마등처럼 내달리는 등불처럼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인지도 몰라 바로 지금이 마지막 숨결을 삼키고 있는 그 찰나인지도 몰라 그래서 몇 십 년 전 일이 아까만 같고 시방 피고 있는 저 목련이 이미 오래전에 지던 그 목련만 싶고 그래서 금방 지나고도 영영 그리워지고 내내 서운해지고 그래서 그래서인 거야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피고 지는 목련 아래 아내 손을 맨 처음인 듯 꼬옥 쥐는 까닭은 -전문(p. 175)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채상우/ 경북 영주 출생, 2003년『시..

비등(飛騰) 5/ 최승철

비등飛騰 5 최승철 '컷쇼*' 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직장을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과 절박감 비가 내리자 향초처럼 흙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혼 후 많은 것을 잃었다 행복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꿈속에서 당신의 알몸을 매만지면 무엇인가 생각이 날 것만 같아 허둥대다 깨어 방금 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엔 정말 소중한 기억이 생각나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꿈이 아니었다 어느 아침 나는 온전치 못한 혼자다 -전문(p. 173-174) * 톱날을 밀고 당기는 전동 톱의 일종. 보통 건설현장에서는 '컷쇼'라고 부르는데 영어식 표현은 reciprocating-saw이다.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최승철/ 전북 남원 출생, 2002년『작가세계..

토월천/ 배한봉

토월천 참새 배한봉 잠시 찬 바람 잦아들고 비닐 조각처럼 햇볕이 걸린 천변 난간에 예닐곱 참새가 앉아 짹짹거리고 있다. 몸 숨길 마른 풀도 없고 식량이 될 벌레나 알곡도 없고 둥지 틀 처마 밑이나 흙담 구멍도 없는 하천 바닥을 몇 번이나 맴돌다가 천변 난간으로 날아올라 앉아 저들끼리 뭐라뭐라 토론하고 있다. 할아버지 참새들이 여기서 모래 목욕 즐겼다더라고 옛이야기 재잘대는지 모른다. 종족들과 이사 오려 했는데 혹한기에 낭패라고 한탄하는지 모른다. 뭔지 할 말 남았다고 짹짹거리다 조그맣고 까만 부리 닦던 비닐 조각 같은 햇볕을 놓치고는 황급히 날아오르는 참새들. -전문 (p. 166)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배한봉/ 경남 함안 출생, 199..

천수호_사랑과 하나인 자의식(발췌)/ 그늘을 만드는 시간 : 이규리

그늘을 만드는 시간 이규리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하늘은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터널을 몇 개 지나면서 창 쪽의 내가 가리개를 살며시 올렸다가 빛이 돌아오면 내리곤 했다 옆자리의 책 읽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나의 일 몇 차례 가리개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사람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둠과 밝음을 발명해내는 시간 안에는 반지하의 터널이 있고 옥탑의 가파름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들고 나는 마음은 왜 이토록 세심한가 쓸쓸할 때 하찮음은 몸에 밴 나의 일, 그게 누구라도 부디 가리개를 올리고 내릴 때의 힘이 고요하기를, 적당하였기를 햇빛을 조절하던 집중은 꽤 쓸 만했지만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하지 않은가 책의 제목이 궁금했던 한 사람을 ..

전철희_유토피아를 향한 열망과 자유(발췌)/ 연두 : 신동옥

연두 신동옥 아름다운 시절에는 거짓부렁으로 슬픈 이야기를 지어 나누어 가졌다 온몸으로 흐느끼며 기둥을 감아 오르다가 댓돌에 스미어 번지던 봄빛 오래 버려둔 마당으로 잡풀이 옮아가고 홀씨 터럭 날리는 박석 위에 살림을 차린 고양이 주인을 잃은 처마 밑으로 예년의 제비가 돌아왔는데 지붕은 반나마 내려앉았고 아귀가 틀어진 문틈으로 보인다 더는 견딜 수 없던 그 언젠가 부러 나누었던 서글픈 이야기 그마저 이제는 꿈만 같아서 넘치는 설움을 봄빛에 비벼 고수레로 모셔둔 지붕 너머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뒤꼍 대숲 언저리 새잎 곧 돋아나는 봄 한철 일없이 무성해 갈 꽃과 이파리의 계절 사이를 긋고 지나가는 소낙비에 물든다 기묘히도 흐렸던 하늘 갈라 터지는 구름장 아래로 눈..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6/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6 정숙자 여름날 뭉게구름만큼이나 많은 슬픔을 농사지었습니다. 그 목화로 실을 뽑아 하늘 닿는 가락을 수놓으려 합니다. 희디흰 실을 뽑고 남은 씨앗으로는 내일을 그리지요. 검고 검은 겨울밤이면 창문 흔드는 바람 소리와 ᄒᆞᆷ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삐걱삐걱 세상을 읽겠습니다. (1990. 10. 8.) 지금, 이곳은 어디일까요? 연옥이란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에 쓴 사후 세계 어디일까요? 아닌 듯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하루하루ᄀᆞ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저녁노을이 새삼 꽃ᄃᆞ웠습니다 -전문(p. 2_자필// p. 160-161_활자) ----------------------- * 『딩아돌하』 2024-봄(70)호 에서 * 정숙자/ 전북 김제 출생..

이구한 _ 타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발췌)/ 화장(火葬) : 이영주

화장火葬 이영주 여인이 강가에 앉아 탯줄을 태우고 있습니다 아이의 목을 휘감던 탯줄을 잘라내고 하얗게 질린 아이의 영혼을 먼 땅으로 보내기 위해 여인은 바구니를 띄웁니다 두 손을 모으고 폭염에 달아오른 별을 빨아들이다 툭툭, 붉은 물집이 터지는 여인의 뒷목 알 수 없는 주문이 물살에 떠밀리며 휘청거립니다 타오르던 연기가 올라가 박힌 뜨거운 별들 까맣게 물들어가는 하늘의 흉터들, 여인이 불러낸 주문은 흉터 속에 봉인된 채 함께 썩어갑니다 어디론가 떠밀려간 바구니의 목을 휘감고 두꺼운 꼬리를 탁탁 내리치는 거친 물살 온몸이 점점 녹아가는 여인은 불구덩이를 끊임없이 쑤셔댑니다 얼굴 없는 아이가 불길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걸어온 지친 소가 강물에 머리를 담그로 자갈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열에 들뜬 콧김이..

안녕은 무사입니까?/ 진혜진

안녕은 무사입니까? 진혜진 무협지 속 우리는 순간순간 죽지 못해 적이 됩니다 권법을 정독한 고수가 아니라서 말의 혈만 찌르는 자객들 서로에게 긍정만 겨누지 못합니다 태양 아래 우뚝 선 두 그림자 아래 당신의 긍정과 나의 긍정은 방향이 달라 말이 달리면 온통 찢어지는 세상 같아 우린 종로를 누비다 강호고등어구이집에서 간신히 두 젓가락을 든 무사가 됩니다 안녕의 맛이 이처럼 담백하니 무적의 고등어를 오늘의 진정한 고수로 인정합시다 말과 말을 거쳐 온 자객 하나, 자객 둘······ 안녕의 목이 계속 베입니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렵다는 말 앞에서 가장으로부터 멀어지는 당신 안녕엔 착한 그림자와 착한 바람과 착한 지상이 필요한데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쓴 말들로 무성한 무림은 계속되어 우리의 안녕을 ..

그늘의 사랑/ 정일근

그늘의 사랑 정일근 커피벨트 고산지역의 아라비카 커피 열매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그림자 나무 아래서 명품의 맛이 든다 이 나라 깊은 산 어느 그늘에 자란 산삼이 최고의 명약이 된다 맹독 가진 뱀이 그늘에서는 유순해져 사람을 피해 간다 보아라, 꽃은 그늘에서 향기를 만들고 볕 아래서 시든다 시인이여, 너 또한 꽃 지는 그늘에서 시를 만나지 않았는가 우리 입맞춤이 그늘에서 가장 뜨거웠던 법이니 정수리가 서늘해지는 그늘의 사랑이 있고 그 그늘에서 열매가 달게 익는다 너는 뼈 익고 살타는 햇볕 속을 걸어가면서 적의 없이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볕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볕이 주는 선물이니 절하며 감사하며 받아라 -전문(p. 162)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상반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