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매화를 그리다 1/ 문영하

매화를 그리다 1     문영하    아버지는 새해 첫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75세, 2002년의 화두; '올해는 버리는 해'  "기쁨도 슬픔도 다 버리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응시한다"   아버지, 서울로 향한다는 연락이다. 한사코 큰 병원을 거절하시더니  이제 때가 되어 자식 곁에서 문을 닫겠다고 결심한 모양.  "일흔다섯이 넘으면 여럿에게 폐를 끼친다." 늘 말씀하시더니  일흔다섯 5월, 영면에 드셨다   마당에 있던 매화가 가지를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등불을 켜 놓고 책상 앞에서 꽃 피우기에 골똘하셨다.  새벽 내내 꽃의 향기를 모으던  아버지 다정한 꽃으로 원고지에 촘촘히 앉으시더니   내 몸 어딘가 숨었다가  해마다 봄이면 환한 꽃으로 건너오신다    -전문(p. 90..

5월/ 강송숙

5월     강송숙    노모는 꿈자리가 복잡하면 전화를 하신다  조심하라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으로 이미  심란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원주발 먹구름이 통째로 몰려오겠군   마당에서 놀던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아침부터  시원치 않다 저런 모양새면 동물병원에 데려가도  별 방법이 없다 늘어진 고양이를 담요에 말아 놓고  나는 일을 보러 간다  두 달도 살지 못한 고양이가 혼자 죽어가는 동안  사람을 만나고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신다   반나절 만에 돌아와 나는 상황을 수습하고  남은 고양이와 어미는 죽은 참새를 가지고 논다  저 빠른 망각이 부럽다   그날 밤 멀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꿈을 꾸었는데  혹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까  크게 서운하지 않았다     -전문(p. 84)   ---------..

온기/ 서양원

온기     서양원    말기암 투병 중의 아내가  간호 끝에 지쳐 새우잠을 자고 있는 내 등을 쓰다듬는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수만 가지 감정이  등 뒤부터 혈관을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긴 세월의 강을 함께 건너온  그녀의 푸른 성정이 아프게 돋아난다   미안함과 고마움과  안타까움의 슬픈 연주   이승과 저승의 벼랑길에 서서 보내는  그녀의 진심 어린 연주에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안으로 삼킨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하고  손발톱이 빠지고  타들어가는 항암 주사를 수십 번 맞으면서도  내 앞에선 애써 웃음을 보이는 그녀  그녀가 지쳐가는 만큼 나도 지쳐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또 한편..

새해 아침/ 김지헌

새해 아침      김지헌    백지 한 장이 다시 주어졌다  온전히 비워진 주관식 문제지를 놓고  무슨 문장을 써 내려갈까  무슨 색칠을 할까 잠시 생각하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아직도 빈 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때는 백지의 무게가 너무나 하찮아  쓸데없는 넉서로 채우곤 했었다  무엇을 그려도 수정이 가능했고  지난밤 수없이 파지를 구겨 던졌어도  아침은 어김없이 새 얼굴로 맞아 주었으니까   우물쭈물하는 사이  빈 종이엔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고해성사조차 미적거리다  또다시 맞닥뜨린 새해 아침   정답 칸을 하나씩 밀려 쓸 수도  모두 같은 답으로 채울 수도 없는 난감이라니  벼락치기 공부로 눈이 빨개진 아침  앞마당 잡풀 더미에선 분명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난 가을 골절된 손..

아마도, 아마도/ 김금용

아마도, 아마도      김금용    가본 적도 없는 들은 적도 없는  아마도, 아마도 중얼거리다  꿈길 끝에 열린 아마도엔  물결 따라 넘실거리는  꽃나무 하나 눈부시게 서있네   도망치지 않고 진솔한 마음 따라가다 보면  열일곱 살 볼 붉은 소년이  늙지도 아프지도 않은 풋풋한 모습으로 반기네   마다가카르 바다에서부터 밀려든 해풍이  넘실거리는 파도에 꽃나무를 박은 것인지  꽃나무 때문에 아마도 섬이 된 것인지  자카란다 꽃잎들이 내 손바닥에 어깨에 내려앉네   허리케인이 섬을 뒤집어 놓은 뒤에도  해초랑 멍게랑 다랑어가 꼬리에 물이랑을 띄우며  나뭇가지마다 둥글게 꽃을 피워올리는 생각 밖의 섬   꽃잠에 취한 딱새가 콩새가 물까치가  짝을 찾아 날아오르는  꿈길 밖 아마도를  나도 찾아갈 순 있는..

2월이 오면/ 김미형

2월이 오면      김미형    소소리바람이 지나간다  나무 밑동을 보듬었던 마른 잎들이 그제야 떠난다  박새가 구슬 목소리로 쭈뼛거리는 봄을 부른다  금빛 히어리꽃 타래가 계곡 문을 열면  숲길도 말랑말랑 아는 체한다  강가 수양버들 줄기에 연둣빛이 어룽거리고  퍼렇던 강물도 연하늘색으로 엷게 웃는다  산수유나무에는 직박구리들이 찾아와  안부를 주고받느라 시끄럽다  오래된 집 꽃밭에도  봄 햇살이 시나브로 드나들 즈음  가장 먼저 봄 등 밝히는 수선화  움츠렸던 엄마의 어깨도 노랗게 웃는다   입춘이 흘러가면  겨우내 따뜻했던 우물물이  다시 차가워진다     -전문(p. 18) --------------------- * 『미네르바』 2024-봄(93)호 에서 * 김미형/ 경남 남해 출생, 2003..

시간성_나의 시를 말한다(부분)/ 삼김시대 : 김건영

삼김시대      김건영    여름밤의 하늘은 구운 김이다  밤에는 구멍 뚫린 곳이 모두 빛난다  저것은 모두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고  박쥐가 되어버린 천체天體를 아시나요   동전은 모두 하늘로 떨어진다  종이처럼 얇게 골목에 펴 발라진 이것은  김이거나 검은돈   세상에 김 씨가 너무 많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얇게 펴진 마른 종이는 먹거나 먹히는 데에 쓴다   빨려 들어가듯 편의점에 다다르면  벌레들이 가득하다  해태海苔와 눈먼 해태가 있다  구운 김을 검은 간장에 찍어 드셔보세요  이것은 훌륭한 안주安住입니다  원怨 플러스 원怨  무병과 장수가 가득한 편의점으로 오세요  밤 과음過飮 악惡 사이 흥얼거리며  나의 편의를 위해 돈을 씁시다  동전 밑이 어둡다   지불 능력이 있다면  밤에 김을 ..

방아쇠증후군/ 강기옥

방아쇠증후군      강기옥    "아야야 아야"   과녁도 없이 겨냥하는  아내의 총구에는 총알이 없다   좁쌀과녁이라도 되어야 할 상황에  나는 철없이 화약만 장전했다   식탁에 윤기를 더하려는  칼질과 가위질   난도질당하는 건  도마가 아닌 엄지손가락이었다   방아쇠를 움켜쥔 뼈마디에  열불만 질러대는 철없는 밥상   사단장 군단장을 능가하는  된장 간장 고추장을 거느린 명장   서툰 총잡이가 당기는 방아쇠에  내 뼈마디가 미리 아프다     -전문(p. 58-59)   --------------------  * 『월간문학』 2024-3월(661)호 > 에서  * 강기옥/ 1995년 『문학공간』으로 등단, 시집『빈자리에 맴도는 그리움으로』『그대가 있어 행복했네』『오늘 같은 날에는』등

액체 시대*/ 강서일

액체 시대*      강서일    잉여의 손  잉여의 불빛   잡을 인형이 많아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처럼  볼 것이 너무 많아 한 편도  보지 못하고 밤을 넘긴다   수많은 선택지와  수없이 구멍 난 파지가 쌓여 가는  나날들이라니   놀라지 마시라  지금은 천년 빙하가 녹아내리고  명사는 동사가 되어 흘러내리는,   벽에 걸린 거울은 산산조각  파편이 되는 시간,   늙는다는 것은 과연  살아남는다는 것인가   신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은 희망을 멈출 때뿐**    그러니 놀라지 마시라  미라는 미라일 뿐,   시간의 밀원지 따라 돌다리도 흘러가고   무너질 것은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이니   지붕을 덮치는 액체 시대여     -전문(p. 52-53)    *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

큰기러기 필법(筆法) 외 1편/ 윤금초

큰기러기 필법筆法 외 1편      윤금초/ 시조시인    발묵 스릇 번져나는 해질 무렵 평사낙안  시계 밖을 가로지른 큰기러기 어린진이  빈 강에 제 몸피만큼 갈필 긋고 날아간다.   허공은 아무래도 쥐수염 붓 관념 산수다.  색 바랜 햇무리는 선염법을 기다리고  어머나! 뉘 오목가슴 마냥 젖네, 농담으로.   곡필 아닌 직필로나 허허벌판 헤매 돌다  홀연 머문 자리에도 깃털 뽑아 먹물 적시고*  서늘한 붓끝 세운다, 죽지 펼친 저 골법骨法.     -전문(p. 36)    * 큰기러기는 공중을 날 때 人자 모양 어린진을 친다. 대오 가운데 맨 우두머리가 항상 앞장서서 리더 역할을 한다. 큰기러기는 잠시 머물다 간 자리에도 깃털을 뽑아 떨어뜨려두는 습성이 있다. 이른바 '유묵遺墨'처럼 제 다녀간 흔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