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459

김경성_이 계절의 시/ 지팡이 : 오탁번

지팡이 오탁번(1943-2023, 80세) 지팡이 짚고 마을 뒷산을 쉬엄쉬엄 오른다 숲을 메운 적막을 지나다 통통하니 실한 나무를 그냥 한 아름 안아 본다 바람 불고 비 오고 까마아득하게 세월이 흐르면 지저깨비가 되는 항하사恒河沙 같은 산색山色 그 발치에나 묻힐 ! 같은 지팡이 하나 -전문(p. 10-11) ▲ 오탁번(1943~2013, 80세)/ 충북 제천 출생. 원주중.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 당선. 육사 교수부, 수도여사대,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역임. 그의 시에는 압축적인 서사적 상상력을, 소설에는 시적 문체와 구성을 수용해 우리 문학의 형식 미학을 최고 경지로 끌어올렸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

김남권_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부분)/ 새로운 길 : 윤동주

새로운 길 윤동주(1917~1945, 28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전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별이 된 시인의 흔적을 찾아서 '윤동주문학관'에 가다(발췌)_김남권/ 시인 윤동주문학관으로 향하는 길목은 이미 연둣빛 새순이 파도처럼 밀려와 은행나무에도 목련나무에도 벚나무에도 신록이 물결치고 있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를 나와 자하문 터널 방면으로 15분 정도 걸으면 터널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인도 변 이정표를 따라 언덕길을 20분 정도 걸어 올라가..

유고 시집) 거기 한 사람이 서 있다/ 김기석

거기 한 사람이 서 있다 김기석(1957-2018, 61세) 절망의 바다 끝에서 모든 것을 잃은 자만이 모든 것을 얻는다 하였네 버렸던 고깃배 3년의 세월 '누가 알랴' 알몸을 싣는 저 사내들의 허허바다. 게다가 그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 밤을 맞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찾아오는 것은 허무 허무의 빈 바다 바로 이 누구도 어쩌지 못할 절망의 바다 끝에서 그분 홀로 서 계신다 밤을 보내지 않은 새벽이 없었으니 절망에 빠지지 않은 희망은 없다 병들지 않은 치유가 없었으니 불신의 늪을 건너지 않은 신앙은 없다 죽은 자의 빈 무덤 그 무덤의 어둠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의 부활도 날이 새어갈 때 길고 어둡던 밤이 지나고 마침내 동녘 하늘이 밝아올 때 절망의 바다 그 바다의 끝에서 밤새도록 헛손질만 되풀이한 외..

유고 시집) 서문/ 거울 속의 남자 외 1편 : 김기석/ 추모의 글

에서 서문 故 김기석 시인은 2018년 2월 3일 안산 빈민가 원룸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5평 남짓한 싸늘한 골방 책상 위에는 시 80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막노동과 씨름하면서도 시혼을 불태우던 사람. 매운맛 쓴맛 다 보고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말없이 위로가 되어준 것은 시였다. 김 시인 영전에 유고 시집 『허무의 빈 바다』를 올린다. -김명중/ 인사동 tv 운영자 ---------------------------- 거울 속의 남자 외 1편 김기석(1957-2018, 61세) 가죽 부대를 쓴 한 사내가 거울 거울 속에 서 있다 앞니 빠진 작은 아이가 묻는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내가 너란다 아니요 저는 그렇게 성장하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는 저의 꿈이 아니에요 얘야, 꿈이란 외모가 아니라 선善을 잃지 ..

출발/ 이승훈

출발 이승훈(1942-2018, 76세) 가랑비가 내리는 아침 그는 출발한다 출발이라? 그렇다 그는 어제도 출발하고 그저께도 출발했다 내일도 출발한다 모레도 출발할 것이다 오늘의 출발이 어제의 출발이고 어제의 출발이 내일의 출발이다 출발은 좋은 일이다 눈 내리는 저녁 그는 출발한다 모자를 쓰고 출발한다 이놈의 출발은 언제 끝나려는지 그건 신(?)만이 아는 일! 그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출발은 언제나 출발이므로 약을 먹고 출발하지만 바람이 불고 출발은 무수히 많다 그도 무수히 많다 무수히 많은 그가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외로우면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다 너와 함께라면 소나타를 타고 출발할 것이다 완행열차도 있지 코스모스도 있을 거다 출발은 그의 삶의 형식이다 아직도 그는 그의 터미널에 도착하지 못했..

김경성_이 계절의 시/ 봄2 : 윤동주

봄2     윤동주(1917~1945, 28세)    봄의 혈관血管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전문(p. 14-15)   ▲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했다. 1931년 명동소학교와 1938년 용정 광명중학교 졸업했으며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39년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으며 1942년 일본 릿교대학에 입학, 이후 도시샤대학으로 전학했다.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이준관_완행버스 같은 동심의 시인···(발췌)/ 완행버스 : 임길택

완행버스 임길택(1952-1997, 45세) 아버지가 손을 흔들어도 내가 손을 흔들어도 가던 길 스르르 멈추어 선다 언덕길 힘들게 오르다가도 손 드는 우리들 보고는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우리 마을 지붕들처럼 흙먼지 뒤집어쓰고 다니지만 이다음에 나도 그런 완행버스 같은 사람이 되고만 싶다 길 가기 힘든 이들 모두 태우고 언덕길 함께 오르고만 싶다 -전문- ▶완행버스 같은 동심의 시인, 임길택(발췌) _이준관(시인, 아동문학가) 임길택은 내가 꼭 한 반 만나고 싶었던 시인이었다. 그러나 1997년 45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이제는 나에게 그리운 이름이 되어버린 임길택은 강원도 탄광 마을과 산골 마을에서 15년 동안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이야기를 동시와 동화로 ..

냉동 새우/ 허수경

냉동 새우 허수경(1964-2018, 54세) 이 굽은 얼음덩어리를 녹이려고 물을 붓고 기다렸다 몸통은 녹아가도 굽은 허리는 펴지지 않았다 피곤,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물어지지 않은 피곤의 흔적이라는 헤아릴 수 없음도 녹은 새우를 어루만졌다 말랑말랑하구나, 네 몸은 이루어질 수 없는 평화 같은 미지근한 바다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꿈에서 돌아오듯 나는 시를 쓰는 것을 멈추었고 이제 시 아닌 다른 겹의 시간에게 마른 미역 봉지를 건네주었다 새우는 다시 얼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저녁을 향하여 무심히 죽어 있었네 제 살던 곳에서 끌려나와 동유럽 겨울 눈 속에서 구부리고 맨땅에서 국을 떠먹던 난민처럼 내일 새벽 일찍 나가 눈길을 걸어 밥을 벌어야 하는 발처럼 -전문, p. 326 327//『21세기문..

이승하_분단에서 이산으로,···(발췌)/ 뼈저린 꿈에서만 : 전봉건

뼈저린 꿈에서만 전봉건(1928-1988,60세)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을 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이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조용히 웃으시던 그 얼굴의 빛 무늬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

이승하_분단에서 이산으로,···(발췌)/ 열차를 기다려서 : 김규동

열차를 기다려서 김규동(1923-2011, 88세) 비 오는 어두움이 가슴에 아파 그럴 때마다 허망한 거리를 가며 당신이 모습을 찾습니다. 탄환에 쫓긴 사슴 모양 생활의 막다른 골목에서 불현듯이 그대 손길을 더듬어 봅니다. 북에 갔던 항공기의 편대들이 푸른 공간 위에 폭음을 굴릴 적마다 그대 모습을 어루만집니다. 다섯 해의 세월이 지나갔어도 꿈에 뵙는 당신의 그림자는 항시 환히 밝아······ 육십오 세의 흰머리 날리시며 어머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큰 우레 산하를 진동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인민의 눈동자 별빛처럼 타는 밤 ······ 삶을 위한 싸움 속에 자유를 위한 신음 속에 우리 모두 대열져 섰거늘! 이윽고 목메인 평화의 아침이 열리면 그 무슨 주저도 없이 달려갈 아들들 열차를 기다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