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459

고형진_세상에서 가장 슬픈 속삭임(발췌)/ 속삭임 1 : 오탁번

속삭임 1     오탁번(1943-2023, 80세)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김미연_소년문사로 시작한 조숙한 시인의···(전문)/ 서시, 산경표* 공부 : 이성부

서시,      산경표* 공부       이성부(1942-2012, 70세)     물 흐르고 산 흐르고 사람 흘러  지금 어쩐지 새로 만나는 설레임 가득하구나  물이 낮은 데로만 흘러서  개울과 내와 강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듯이  산은 높은 데로 흘러서  더 높은 산줄기를 만나 백두로 들어간다  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산은 위로 치솟는다  흘러가는 것들 그냥 아무 곳으로나 흐르는 것  아님을 내 비로소 알겠구나!  사람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들 흘러가는지  산에 올라 산줄기 혹은 물줄기  바라보면 잘 보인다  빈 손바닥에 앉은 슬픔 같은 것들  바람소리 솔바람소리 같은 것들  사라져버리는 것들 그저 보인다     -전문-     * 산경표山經表: 영조 때 학자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

이경철_한국문학 연대를 한 세대 더 늘려놓은···(발췌)/ 그대 있음에 : 김남조

그대 있음에      김남조(1927-2023, 96세)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이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전문-   ▶한국문학 연대를 한 세대 더 늘려놓은 순열한 사랑(발췌)_이경철/ 시인 · 문학평론가  김 시인은 1948년 ⟪연합신문⟫에 시 「잔상殘像」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6.25 전쟁 와중인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무명의, 그러나 총혜聰慧로운 한 처녀..

이숭원_영성(靈性)의 시인 김남조(발췌)/ 순교 : 김남조

순교      김남조(1927-2023, 96세)    예수님께서  순교현장의 순교자들을 보시다가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를 모른다고 해라  고통을 못 참겠다고 해라  살고 싶다고 해라   나의 고통이 부족했다면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련다고 전해라     -전문(『충만한 사랑』)   ▶영성靈性의 시인 김남조(발췌)_이숭원/ 문학평론가  2023년 10월 10일 만 96년간 지켜온 지상의 손을 거두었다. 1950년 처음 시를 발표한 때로부터 73년의 시력이 쌓이고 1953년 첫 시집을 발간한 이후 만 70년 동안 19권의 개인 시집을 문학사의 기록에 남긴 기념비적 생애였다. 『문학사상』 추모 시인론에서 "이로써 한국문학은 시문학의 장엄한 도서관 하나를 잃었다. 그의 삶의 이력은 한국 현대 시사 그 자..

유성호_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부분)/ 꽃은 지고 : 박재두

꽃은 지고      박재두(1936-2004, 68세)    아홉 겹 성곽을 열고 열두 대문 빗장을 따고  바람같이 질러온 맨 마지막 섬돌 앞  뼈끝을 저미는 바람, 추워라, 봄도 추워라   용마루 기왓골을 타고 내리던 호령 소리  대들보 쩌렁쩌렁 흔들던 기침 소리  한 왕조 저문 산그늘 무릎까지 묻힌다.   다시, 눈을 닦고 보아라. 보이는가  칼 놀음. 번개 치던 칼 놀음에 흩어진 깃발  발길에 와서 걸리는 어지러운 뻐꾸기 울음.      -전문(1981년)   ▶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 사량도의 시인(부분)_유성호/ 문학평론가      전남 통영의 사량도 능양마을에는 「별이 있어서」라는 작품이 새겨진 박재두 시비가 서 있다. 뱀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의 사량도蛇梁島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중..

광야/ 김남조

광야     김남조(1927-2023, 96세)    오늘 이미 저물녘이니  나의 삶 지극민망하다  시를 이루고저 했으되  뜻과 말이 한 가지로 남루이었을 뿐  생각느니 너무 오래  광야에 가보지 못하였다   그곳은 키 큰 바람들이  세월없이 기다려 있다가  함께 말없이 오래오래  지평을 바라보아 주는 곳  그러자니 어른이 좀 되어 돌아오는 곳   삶의 가열한 반의 얼굴,  혼이 굴종당하려 하면  생명을 내던지고 일어설 계율을  이 시대 동서남북  어느 스승이 일깨워 주는가  어느덧 나는 사랑을 말하지도 않고  번뇌하는 두통과도 헤어져    반수면의 수렁에서  안일 나태한 나날이다가  절대의 절대적 위급이라는  음습한 독백에 부대끼노니    필연 광야에 가야겠다  그곳에서 키 큰 바람들과  말없이 오래오..

초파일 밤/ 김지하

초파일 밤      김지하(1941-2022, 81세)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 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 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자국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

김정자_시인은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발췌)/ 균열(龜裂) : 김민부

균열龜裂     김민부(1941-1972, 31세)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  배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    할 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나   남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눈 먼 사투리는  밤의 소용돌이 속에  피 묻은 푸른 달빛   없는 것, 그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소리   바람 불어··· 아무렇게나 그려진  그것의 의미는   저승인가 깊고 깊은  바위 속의 울음인가   더구나 내 죽은 후에  이 세상에 남겨질 말씀인가    -전문-   ▶ 시인은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 고뇌와 마주서야 한다(발췌)_김정자/ 시인 · 문학평론  이 작품은 시인의 나이 17세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다. 우리는 16세 때 라틴어 시로 일등상을 타게 된 ..

김경성_이 계절의 시/ 서정가(抒情歌) : 신석정

서정가抒情歌      신석정(1907~1974, 67세)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 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휘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 버리는······    -전문 (韓國現代詩文學大系 11 『辛夕汀』, 1985. 智識産業社, 64쪽)   ▲ 신석정(辛錫正, 1907~1974, 67세)/ 전북 부안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석정錫正, 호 및 필명은 석정石汀, 夕汀, 釋靜, 석지영石志永,  호성胡星, 소적..

임승빈_별에 이르는 길(발췌)/ 저녁에 : 김광섭

저녁에 김광섭(1905-1977, 72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전문- ▶별에 이르는 길(발췌)_ 임승빈/ 시인 이 시는 1969년 11월에 발행된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실려 있다. 당시에 나는 이 시집을 사고도, 이 시는 읽을 수가 없었다. 목차에 보면 이 시는 83쪽에 있어야 하는데, 내 시집은 77쪽부터 96쪽까지가 없었다. 파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군 복무 중이던 1976년 초봄에 외출을 나갔다가 전주에 있는 에서 1975년 에서 나온 김광섭 시선집 『겨울날』을 샀고, 거기에서 비로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