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459

이승하_분단에서 이산으로,···(발췌)/ 한가위 : 구상

한가위 구상(1919-2004, 85세)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 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전문- * 신부 형 : 나의 친형 구대준具大浚은 가톨릭 신부였음 ▶ 분단에서 이산으로, 이산에서 통일로(발췌)_이승하/ 시..

이경수_고독과 깊이의 시인, 김현승/ 절대고독 : 김현승

에서 절대고독 김현승(1913-1975, 62세)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내고 만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와 함께 -『절대고독』(성문각, 1970) 전문 ▶ 고독과 깊이의 시인, 김현승(..

오탁번_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추모글 : 유자효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1943-2023, 80세)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

시를 읽다/ 김재윤

시를 읽다 김재윤(1965-2021, 56세) 아카시아꽃으로 향을 피우고 제祭를 올렸다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제문을 읽느라 현기증이 났다 '유세차'는 있는데 '상향'이 없다니 그녀가 달려왔다 내 손에서 제문을 빼앗아 돼지를 삶고 있는 장작불에 태우고 내게 입맞춤했다 나는 검은 관에서 일어나 시를 읽었다 그녀는 산수유로 내 몸을 씻기고 새 옷을 입혀 줬다 칡꽃은 그녀와 나의 봄을 휘감아 하늘을 지향했고 나는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움직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안아달라 했다 천리향에 취해 얼굴이 불콰한 나비의 날개가 하늘에 닿고 대지에 발을 내딛기 위해 겨울을 견딘 달팽이의 뿔도 하늘에 닿았다 -전문(p. 199-200) -----------------------..

김경성_이 계절의 시/ 겨울나무 : 송혁

겨울나무     송혁(宋赫 1935-1985, 50세)    겨울에는  저 짙푸른 솔바람소리를 듣는다  山寺에 잠시 기대어 듣는다  옛날 그 옛날의 솔바람, 神바람 소리다   겨울에는  지닌 것을 모두 버린 다음  버렸다는 마음까지도 잠재우고  맨 몸으로 體操를 하는   저 裸木을 지켜 본다   忍苦의 저 억센 沈默은  누구의 가르침이던가   겨울에는 듣는다  저쪽 北風에 못 견디어 달려 오는  아우성 소리를 듣는다   白衣觀音像되어  온몸 온마음으로 베풀기만 한다   빈손이면 어떠랴  저 많은 서릿발 무리도 가슴에 안고  더러는 어깨에 짊어지고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본다     -전문-   ◈ 송혁(宋赫 1935-1985, 50세) _ 김경성/ 시인  본명은 재갑在甲. 전북 고창 출생. 동국대 국문과 ..

노용무_한국 문학과 자연(발췌)/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백석(1912-1996, 84세)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다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세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몽돌을 읽어 보다/ 유봉희

몽돌을 읽어 보다 유봉희(1942-2022, 80세) 찰랑이는 물가에서 돌들은 하나같이 둥글어지고 있었다. 살아온 내력이 같아서인지 둥글게 사는 것이 한 생의 목표인지 누가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소금기 절은 상처가 제 무늬로 떠오르기까지 바람과 파도는 얼마나 긴 시간을 치유의 입술이 되었을까 그 아득한 걸음이 문득 엄숙해져서 사열대 지나듯 돌밭을 걷다가 돌 하나 집어 들었지 몸통엔 파낸 듯 알파벳 글자와 흘림한글 철자가 뒤 암반에는 수사슴 한 마리가 선사시대를 뛰어 넘어오고 있다 아무래도, 어느 멀고 먼 시간에서 어떤 이가 보낸 메시지인 것만 같아 마음은 금방 날아오를 날갯짓으로 부풀어 오르지만 내 어리석음은 바다 깊이로 내려앉아 있고 나의 지식은 물 위의 살얼음 같아서 건너갈 수가 없구나..

정과리_조지훈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부분)/ 봉황수 : 조지훈

봉황수 조지훈(1920~1968, 48세)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秋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 종구품正一品 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전문 - * 조지훈, 『조지훈 전집 - 1. 시』, 일지사, 1973, p.1973. p.22. 한자는 모두 한글(한자)로 바꿨다. ▶조지훈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발췌)_정과리/문학평론가 이 시를 전..

김동수_신석정과 어머니 기억(발췌)/ 어머니 기억 : 신석정

어머니 기억 어느 소년少年의 신석정(1907~1974, 67세)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서졌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해풍 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웠었다. 쏴아~ 먼 바람소리가 밀려오고 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 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 산수유꽃 봉오..

호수(湖水)/ 오장환

호수湖水 오장환(1918-1951, 34세) 호수에는 사색四色 가지의 물고기들이 살기도 한다. 차디찬 슬픔이 생겨나오는 말간 새암 푸른 사슴이 적시고 간 입자족이 남기어 있다. 멀리 산간에서는 시냇물들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어오고 어둑한 숲길은 고대의 창연한 그늘이 잠겨 있어 나어린 구름들이 한나절 호수가에 노닐다 간다. 저물기 쉬운 하룻날은 풀뿌리와 징게미의 물내음새를 풍기우며 거무른 황혼 속에 잠기어버리고 내 마음, 좁은 영토 안에 나는 어스름 거무러지는 추억을 더듬어보노라. 오호 저녁바람은 가슴에 차다. 어두운 장벽臟壁 속에는 지저분하게 그어논 소년기의 낙서가 있고, 큐비트의 화살 맞었던 검은 심장은 찢어진 대로 겉날리었다. 가는 비와 오는 바람에 흐르는 구름들이여! 너는 어느 곳에 어젯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