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출발/ 이승훈

검지 정숙자 2023. 7. 4. 20:03

 

    출발

 

    이승훈(1942-2018, 76세)

 

 

  가랑비가 내리는 아침 그는 출발한다 출발이라?

  그렇다 그는 어제도 출발하고 그저께도 출발했다

  내일도 출발한다 모레도 출발할 것이다 오늘의

  출발이 어제의 출발이고 어제의 출발이 내일의

  출발이다 출발은 좋은 일이다 눈 내리는 저녁

  그는 출발한다 모자를 쓰고 출발한다 이놈의

  출발은 언제 끝나려는지 그건 신(?)만이 아는 일! 그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출발은 언제나 출발이므로

  약을 먹고 출발하지만 바람이 불고 출발은 무수히

  많다 그도 무수히 많다 무수히 많은 그가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외로우면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다 너와

  함께라면 소나타를 타고 출발할 것이다 완행열차도

  있지 코스모스도 있을 거다 출발은 그의 삶의

  형식이다 아직도 그는 그의 터미널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의 정류장에 그의 정박지에 그의 항구에 비가 내린다

  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맙시다 출발이

  빛이고 절망이다 가랑비가 내리는 아침 출발합시다

  진눈깨비가 치는 저녁 출발합시다 안개가 끼는 밤에

  출발합시다 출발은 숙명이니까!

    -전문(p. 240)

 

   * 400호를 기념하여 이승훈 시인을 리바이벌한다. 젊은 시인들의 시 읽기가 편협하여 한국시의 전위인 이승훈, 오규원을 모른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본지는 본지의 편집위원과 추천심의위원을 역임한 이승훈 시인 기념사업을 구상하고 있으며, 자세한 것은 추후 알려드릴 예정이다. <편집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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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3-4월(400)호 <리바이벌>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