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시집> 에서
서문
故 김기석 시인은 2018년 2월 3일
안산 빈민가 원룸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5평 남짓한 싸늘한 골방 책상 위에는
시 80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막노동과 씨름하면서도
시혼을 불태우던 사람.
매운맛 쓴맛 다 보고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말없이 위로가 되어준 것은 시였다.
김 시인 영전에 유고 시집
『허무의 빈 바다』를 올린다.
-김명중/ 인사동 tv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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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남자 외 1편
김기석(1957-2018, 61세)
가죽 부대를 쓴 한 사내가 거울 거울 속에 서 있다
앞니 빠진 작은 아이가 묻는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내가 너란다
아니요 저는 그렇게 성장하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는 저의 꿈이 아니에요
얘야, 꿈이란 외모가 아니라
선善을 잃지 않음이야
외모는 볼품 없지만
나는 지금도 너처럼 살고 있단다
-전문(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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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보고서 1
흙먼지만 날리던 어린 시절 나의 세상은
'······'
푸른 하늘이 보이는 운동장이
나의 전부였습니다
아침 자율학습 시간 표준전과 동아수련장
갖고 싶었어도 가난하고 고단하신
엄마에게 혼날까 봐
말할 수 없는 슬프고
외로웠던 아이가 나였습니다.
선생님께 야단맞고 복도에 나가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앉아 있으면
칠흑같이 어둔 밤
동짓달 초사흗날 기나긴 밤
별이 된 아버지가 미웠고
가난하고 서글프게 살아온 엄마가
미웠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영천 읍사무소 가는 등굣길에서
은하사진관 앞을 지나
주남 들 쪽으로 걷는 길에선
버릇처럼 걷는 길에 오른쪽 발목이 꺾였고
버릇처럼 길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울기만 했던 아이가
그 어린아이가 나였습니다.
비바람 눈보라와 삭풍이 몰아치던
어느 겨울밤
핏덩이 같은 어린 남매
단칸방에 잠재워 놓고
십구공탄 연탄불 구들장 단칸방 아래
구들목에 홍역으로 잔기침을 하던
영천시 완산동 판잣집 누옥 한 채는
구멍 난 가난과 구멍 난 세상을 통해 바라보는
어린아이가 상처받은 세상은
슬픈 기억 속에 오롯이 떠오르는 한 점 풍경
그해 겨울, 혹독한 비바람과 눈보라와
진눈깨비 몰아치던 추위 속에
어린 내가 어린 누이 너를 보내고
밤새워 울던 밤하늘 별빛만 초롱했던
영천시 완산동 영동교 앞
문내동으로 건너가는 그 뚝방길
-전문(p. 34-36)
* 블로그 註: 위 시에서 마침부호 사용은 원문과 동일함
■ 추모의 글(前略)/ 한국문인협회 안산지부 회원이었던 고 김기석 시인. 2018년 2월, 김 시인의 부고를 접했다. 몇 번이나 진짜 그가 맞느냐고 되물을 만큼 놀랐다. 평소 술을 사랑하긴 했으나 특별한 지병이 없이 건강했던 데다가 며칠 전 협회 모임에서 담소를 나눈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의 외로운 마지막을 통해 그간의 쓸쓸했을 인생사를 알게 되니 안쓰러움이 더했다.
그를 보면 고 천상병 시인이 떠오르곤 했다. 일단 말년의 외모가 비슷하고 술을 좋아하는 것과 기인적인 행동이 닮아서다. 이제 와서 그의 예전 시들을 뒤적이다 보니 가난, 고독, 죽음 등을 서정적으로 깨끗하고 소박하게 표현한 것도 비슷하다. 수개월 밀린 월세로 남는 것 별로 없는 보증금 몇 푼과 틈틈이 모은 책 몇 권이 전부인 삶 또한 무소유의 표본인 천상병 시인을 어쩜 그리고 닮았을까? 아마도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는가 보다.
그의 시에는 어린 시절 가족과의 행복했던 추억이나 아쉬움이 많이 담겨 있다. 주로 엄마와 동생이 등장한다. 유년기를 뺀 나머지 기간 동안 가족을 그리워했음을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나마 말년에 글과 술을 나눌 좋은 문우들이 곁에 있어 조금이라도 위안을 삼았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소식을 들은 문인들이 하나둘 장례식장을 찾았으나 가족이 없어 빈소조차 마련되지 않아 이틀을 헛걸음했다. 몇몇 분을 통해 어렵게 동생과 연락이 되었지만 그 또한 경제적 여력이 없다고 하소연하니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최소화해도 사오백만 원의 비용이 필요했다. 여러 통로를 통해 지자체의 도움이라도 받아보려 했으나 그마저 자격요건이 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처지에 놓였다.
이대로 모른 척할 수 없게 된 안산문인협회 회원들이 즉석에서 자발적으로 십시일반의 아름다운 나눔 운동을 벌였다. 하루 만에 비용의 반이 채워지고 다음 날 나머지가 채워지면서 일사천리로 무사히 장례를 치러낼 수 있었다. 화장장에서 한 줌의 흙이 되어 뿌려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에는 문우들이 함께 했다. (後略) (신현미/ 아동문학가 · 수필가 · 평론가, 안산문협 명예회장)// 2018년 2월 ⟪반월신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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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고 시집 『허무의 빈 바다』에서/ 2022. 9. 27. <도훈> 펴냄
* 김기석/ 1957년 경북 영천 출생, 2009년 월간『스토리문학』으로 등단, <스토리문학/ 문학공원/ 안산문인협회/ 안산사생회> 회원, 공저『제로의 두께』, 첫 시집(유고 시집) 『허무의 빈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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