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저린 꿈에서만
전봉건(1928-1988,60세)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을 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이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조용히 웃으시던
그 얼굴의 빛 무늬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 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 번
그러고도 더 많이 흐른 세월이
가로세로 파놓은 어머님 이마의
어둡고 아픈 주름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눈앞이 먼저 흐립니다.
아아 이십육 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전문-
▶ 분단에서 이산으로, 이산에서 통일로(발췌)_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전봉건은 1928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1945년 평양숭인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에 아버지를 따라 월남한다. 남으로 온 뒤 교원 생활을 하던 그는 부산 피난지에서 자살하는 형 전봉래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징집되어 중동부 전선에 투입된다. 큰 부상을 입고 의병제대를 하는데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여러 편의 시를 쓴다.
*
1972년에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거론되자 전봉건은 큰 기대를 건다. 7· 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어머니를 마침내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 이 시를 썼다. 하지만 유신시대 전개를 앞두고 벌인 정치적 쇼에 지나지 않았던 남북공동성명이라 통일에 대한 꿈은 백일몽이었다. 10년 뒤의 1982년, 이산가족이 처음으로 상봉하게 된다. 전봉건도 만남을 신청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지 이뤄지지 않아서 애끓는 심정으로 위의 시를 썼다. (p. 시 104-105/ 론 103 *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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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詩魔』 2022-여름(12)호 <시詩 읽는 계절>에서
* 이승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시집『사랑의 탐구』『뼈아픈 별을 찾아서』『생애를 낭송하다』『예수 · 폭력』등, 산문집『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등, 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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