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냉동 새우/ 허수경

검지 정숙자 2023. 5. 15. 00:59

 

    냉동 새우

 

    허수경(1964-2018, 54세)

 

 

  이 굽은 얼음덩어리를 녹이려고

  물을 붓고 기다렸다

  몸통은 녹아가도 굽은 허리는 펴지지 않았다

 

  피곤,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물어지지 않은 피곤의 흔적이라는 헤아릴 수 없음도

 

  녹은 새우를 어루만졌다

  말랑말랑하구나, 네 몸은

  이루어질 수 없는 평화 같은 미지근한 바다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꿈에서 돌아오듯 나는 시를 쓰는 것을 멈추었고

  이제 시 아닌 다른 겹의 시간에게

  마른 미역 봉지를 건네주었다

 

  새우는 다시 얼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저녁을 향하여 무심히 죽어 있었네

 

  제 살던 곳에서 끌려나와 동유럽 겨울 눈 속에서

  구부리고 맨땅에서 국을 떠먹던 난민처럼

  내일 새벽 일찍 나가 눈길을 걸어 밥을 벌어야 하는 발처럼

    -전문, p. 326  327//『21세기문학』 2017-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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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수경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서/ 초판 1쇄 발행 2019. 10. 3./ 초판 6쇄 발행 2021. 8. 8. <난다> 펴냄   

  *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 출생,1992년 독일行,서울에 살 때 두 권의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 발표, 독일에 살면서 세 번째 시집『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 학위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옴, 시집『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나는 발굴지에 있었다』『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모래도시』『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동화책『가로미와 늘메 이야기』『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슬픈 란돌린』『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그림형제 동화집』등을 펴냄.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 수상. 2018. 10. 3.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 유고집『가기 전에 쓰는 글들』『오늘의 착각』『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