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459

장적_2045, 열린사회와 그 적들 : 한반도···(발췌)/ 실향기 : 박훈산

실향기失鄕記11) 박훈산(1919-1985, 66세)12) 눈을 뜨면 또 내일이란 것이란다 잊어버리기엔 너무나 새겨진 징그러운 오늘이 내일로 이어간다 앞으로 나아가는 바른 자세는 비틀거리는 걸음 틈에 가로막혀 연륜과 더불어 빨갛게 쏟아온 피 인생은 병들었다 찢어진 가슴 한 귀퉁이에 따뜻한 정을 얹은 보드라운 손길이! 싱싱한 바람을 따라 훌훌 떠나고 싶구나 어디든 그만 가고 싶다 내일이란 오늘로 되도는 어긋난 바퀴에서 정말 눈을 가리고 싶네 -전문- ▶ 2045, 열린사회와 그 적들 : 한반도 문화창발에 부쳐-2(발췌) _장적 아침에 눈을 뜨니 '내일이라는 것'이 시작되는데, 그 묘사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어릴적, 소풍날 아침에 배시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동편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비가 올지도..

송용구_김동명 시집『파초(芭蕉)』에 나타난 생태의식 연구(발췌)

파초芭蕉 초허 김동명(1900-1968, 68세)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노, 파초芭蕉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情熱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76) -전문, 시집 『파초芭蕉』 ▶김동명 시집 『파초芭蕉』에 나타난 생태의식 연구(발췌)_송용구/ 문학평론가, 시인 김동명이 1936년 1월 『조광朝光』에 발표한 시 「파초芭蕉」는 시집 『파초芭蕉』(1938)의 표제작이 되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이성교는 그의 논문 「김동명 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

김경성_이 계절의 시/ 가을이 오면 : 이태극

가을이 오면 이태극(1913~2003, 90세) 풀섶 나무 잎이 노을로 불 붙으면 드높은 창궁은 투명 속의 청자 거울 빠알간 능금알들이 가슴 가슴 안기네 이렇게 가을이 오면 마음은 돛을 달고 그 옛날 뒷들의 능금 밭에 닫는다 못 잊을 하나의 영산을 되찾아나 보련 듯 -전문- ▲ 이태극(1913~2003, 90세)/ 강원 화천 출생. 1936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졸업.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50년 동덕여자초급대학 강사. 1952년 서울대학교 강사를 거쳐 이와여대에서 문학박사, 1959년 이화여대 교수 역임. 1950~1953년까지 전쟁사를 엮은 '뇌우탄막' 등 300여 편의 작품을 내놓아 피난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줬으며, 1955년 ⟪한국일보⟫에 「산딸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

이경수_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발췌)/ 빙하기의 역 : 허수경

빙하기의 역 허수경(1964-2018, 54세)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

장은석_오탁번 싱잉보울(발췌)/ 겨우살이 : 오탁번

겨우살이 오탁번(1943-2023, 80세) 쥐코밥상 앞에서 아점 몇 술 뜨다가 만다 저녁은 제대로 먹으려고 밥집 찾아 들랑날랑하지만 늙정이 입맛에 영 아니다 다 버리고 고향을 찾아왔는데 입은 서울을 못 잊었나 보다 야젓하게 살고 싶지만 뭘 먹어야 살든 말든 하지! 강풍경보가 발령된 겨울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요란하다 다 낡은 분교 사택 지붕도 몽땅 날아가겠다 낙향하여 선비처럼 산다고? 그래 잘 살아라 쌤통! -전문(p. 118-119) ▶오탁번 싱잉보울(발췌) _ 장은석/ 문학평론가 실제 일상에서도 선생은 낙향을 결코 낭만적으로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식인이 말년에 낙향하여 자기 고향을 찾는다는 단순한 서사에 자신을 편입시키고 안주한다는 것이 허무맹랑한 이상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

고형진_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문학의···(발췌)/ 굴뚝 소제부 : 오탁번

中 굴뚝 소제부掃除夫 오탁번(1943-2023, 80세)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 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시 씽그의 드라마를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나는 목례目禮를 했다. 그는 녹슨 북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나는 걸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내 앞을 가로막는 서울의 제기동祭基洞의 겨울 안개를 헤집으며 나아갔다. 개천의 시멘트 다리를 건너며 북을 치는 그를 생각해 보았다. 그냥 무심히 내 말을 잘 안들어 화가 나는 그녀를 생각하듯 그냥 무심히 은이후니. 비극을 알리는 해풍海風의 문을 흔들고 버트레이가 죽고 그의 노모老母가 울고 막이 내린다. 씽그는 만년필을 놓는다. 강의실 창 밖에 겨울 안개가 내리고 아침에 만난 그를 잠깐 생각하다가 코오피 집에 가는 오후약속을 상기했다. 말을 타고 바다로 내달리는 슬픈 ..

류흔_임금이 올라온다, 경계를 하자(발췌)/ 무궁화를 심으과저 : 한용운

무궁화를 심으과저 한용운(1879-1944, 65세)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녯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나무 버혀내고 무궁화를 심으과저 달아달아 밝은 달아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이지러짐 있을 때 사랑으로 도우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가이없이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를 넘어가서 너의 빛을 따르과저 -전문- ▶임금이 올라온다, 경계를 하자/ 경기도 성남누비길 1구간(남한산성길) 걷기(발췌) _류흔/ 시인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은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리고 기념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선생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교육관, 체험학습실 및 야외조각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 19..

문철수_시로 보는 세상/ 집 한 채 : 임강빈

집 한 채 임강빈(1931-2016, 85세) 하얀 길이 다 끝나지 않은 곳에 집 한 채 쓰러질 듯 서 있다 담도 대문도 없는 이 집 주인은 누구일까 신록에 싸여 오히려 고대광실이다 멀리 뻐꾸기가 한데 어울린다 허술한 집 한 채 꿈속 궁전 같다 - 시집 『집 한 채』(황금알, 2007) ▶시로 보는 세상 _문철수/ 본지 발행인 서울이라는 곳에 밤을 가릴 지붕 하나 가지려고 사투를 벌인다. 밀려나면 더 이상 발붙일 곳 없는 유랑민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생의 목표가 되어 삶을 송두리째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빈 몸으로 돌아가는 이 적지 않다. 어쩌다 빈 자리 하나 차지했지만 개발이라는 명분에 더 멀리 쫓겨나기도 한다. 만약, 육신의 집이 아닌 넉넉한 마음의 집을 가지기 위하여 생을 투자한다면 어땠..

카마수트라/ 이인주

카마수트라 이인주(1965-2021, 56세) 애욕에도 공식이 있단다 오나가나 가두리인 세상 무지렁이는 사랑도 못한다 난분분 흩날리는 벚나무 아래 누워 욜랑욜랑 애욕에 휘감기고 싶은데 갈피갈피 쌓인 꽃잎 사이 경전이 숨어 있다니! 생각 없이 휘리릭 춘화도나 넘기고 싶은데 지분지분 수작 발린 술잔이나 기울이고 싶은데 해탈 같은 경전이라니! 아무래도' 침향의 재목이 아닌 나는 한 십 년 더 썩어야 쓰것다 삿갓 쓰고 유장한 길이나 떠야것다 요행히 한계령 어디쯤서 한 맺힌 남정네나 만나 그놈의 발목에 엎어져 부러야것다 백오십여 항목을 백팔 번 읽어도 하, 참 애욕의 진수를 모를 숨이 턱 막힌다 난분분 살아도 절로 넘치는 것, 경전으로 다스리라니! 도道도 너무 닦으면 살맛이 가시는 법 대양홍어도 곰삭아야 제맛인 ..

김미연_자연서정과 신앙서정의 시편들(발췌)/ 풍뎅이 : 김형영

풍뎅이 김형영(1944-2021, 77세) 모가지를 비틀어다오 모가지의 이 하얀 피를 비틀어다오 여름 하늘이 윙윙거리는 어지러움을 어지러움에 묻힌 쾌락을 비틀어다오 비틀어다오 고통 주는 것이 아니라면 꿈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國法도 하느님도 깃들이지 않는 우리들 모가지, 모가지, 모가지의 이 하얀 피의 문을 비틀어다오 오, 우리의 王國인 무덤아. -전문(p. 110-111) ▶자연서정과 신앙서정의 시편들/ 김형영의 시세계(발췌) _김미연/ 문학평론가, 진주교대 강사 시인 김형영(1944-2021, 77세)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6년 『문학춘추』 신인 작품 모집, 1967년 문공부 시인예술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침묵의 무늬』등 수 권이 있고 현대문학상(1988), 한국시협상(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