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시인 추모특집> 中
굴뚝 소제부掃除夫
오탁번(1943-2023, 80세)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 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시
씽그의 드라마를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나는 목례目禮를 했다.
그는 녹슨 북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나는 걸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내 앞을 가로막는
서울의 제기동祭基洞의 겨울 안개를 헤집으며 나아갔다.
개천의 시멘트 다리를 건너며
북을 치는 그를 생각해 보았다.
그냥 무심히
내 말을 잘 안들어 화가 나는 그녀를 생각하듯
그냥 무심히
은이후니.
비극을 알리는 해풍海風의 문을 흔들고
버트레이가 죽고 그의 노모老母가 울고
막이 내린다. 씽그는 만년필을 놓는다.
강의실 창 밖에 겨울 안개가 내리고
아침에 만난 그를 잠깐 생각하다가
코오피 집에 가는 오후약속을 상기했다.
말을 타고 바다로 내달리는
슬픈 사람들,
우리는 에리제에서 코오피를 마셨다.
코오피잔을 저으며 슬프고 가난한 시간 속으로 내달려 갔다.
아침의 그를 문득 생각해 보았다.
은이후니.
집으로 돌아오다가 석탄처럼 검은 빛
그를 다시 만났다.
길고 깊은 암흑을 파내어
아침부터 밤까지 골목을 내달리는
그에게 나는 목례目禮를 했다.
내 전신에 쌓인 암흑의 기류를 파낼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대문을 두드렸다.
은이후니
겨울저녁의 안개를 모호한 우리의 어둠을 두드렸다.
-전문-
▶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문학의 정도를 걸어간 진정한 문인(발췌) _ 고형진/ 문학평론가
이 시는 주인공이 아침 등굣길에 굴뚝소제부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강의실에서 씽그의 드라마를 읽고 오후에 에리제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코오피를 마시고 귀갓길에 다시 굴뚝소제부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제기동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등하교를 하는 영문학과 대학생의 평범한 일과를 그대로 시의 골격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의 일과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주인공은 다른 두 인물인 굴뚝소제부와 여자 친구를 비교하는데, 이렇게 주인공을 중심으로 인물 사이의 관계를 서술하는 것은 소설의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오탁번은 일상의 서사를 진술하되 인물의 갈등과 대립은 제거하고 인물, 배경, 소도구들을 긴밀히 엮어 이미지화함으로써 시의 형식으로 구축한다. 이 시의 중심인물인 '굴뚝소제부'를 비롯해 '그녀', '겨울안개', '시멘트 다리', '커피' 등은 직업적 특성과 색상 감각을 통해 화자의 불투명하고 모호한 처지를 드러내는 이미지로 기능한다. 화자가 강의실에서 읽는 씽그의 드라마 「바다로 간 기사들」이 담고 있는 인물들의 막막한 삶도 화자의 마음을 반영한다. 시인은 드라마 속 진술들을 시 속 화자의 발언으로 활용한다. 시의 화자가 시 속에서 드라마를 읽고 그 드라마의 내용을 화자의 발언으로 치환함으로써 시와 드라마를 자연스럽게 융합시키고 있다. 오탁번 벌써 60년대에 시와 타 장르를 시의 형식 안에 완벽하게 결합한 것이다.
그는 초기 시 38편을 묶어 1973년 『순은의 아침』을 간행한다. 그는 이 시집을 비매품으로 간행해 지인들에게 전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 중엔 이 시집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서정 장르의 확산으로 새로운 모더니티를 구축하여 현대 시의 형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이 시집은 1970년대 전후 우리 현대 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집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p. 시 76-77/ 론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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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토포스』 2023-여름(2)호 <작고시인 추모특집/ 오탁번 시인/ 대표시/ 추모글> 에서
* 고형진/ 1988년 『현대시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인의 샘』『정본 백석 시집』『백석시의 물명고』『박용래시전집』『박용래평전』등
* 오탁번/ 1943년 7월 3일 충북 제천군 백운면에서 태어남, 고려대 영문학과와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문학 박사학위 받음, 석사논문『지용시 연구-그 환경과 특성을 중심으로』는 1970년 당시엔 금기시된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를 처음으로 연구한 논문으로 주목받았으며, 1966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동화 부문 &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 1969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소설 부문 등단, 시집『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손님』『우리 동네』『시집보내다』『알요강』『비백』등,
소설집『처형의 땅』『새와 십자가』『저녁연기』『혼례』『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순은의 아침』『미천왕』『아버지와 치악산』, 2018년에는 등단작 『처형의 땅』을 비롯해 절판된 창작집과 이후 발표작까지 60여 편을 묶운 소설전집『오탁번 소설』전 6권을 펴냈다.
평론집『현대문학산고』『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현대시의 이해』『시인과 개똥참외』『오탁번 시화』『헛똗똑이의 시읽기』『작가수업-병아리시인』『두루마리』등 다양한 산문집도 냈다.
시 진문 계간지 『시안』 창간(1998~2013, 15년), 2008`2010년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2020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수상내역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김삿갓문학상(2010),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상 시 부문 대상(2011), 목월문학상(2019), 공초문학상(2020), 유심문학상 특별상(2020).
오탁번 시인은 2003년 고향인 충북 제천시 백운면의 한 폐교(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에 자신의 문학관을 겸한 '원서헌遠西軒'을 열고 부인 김은자(전 한림대 교수) 시인과 함께 거주하며 자연을 벗하는 삶을 살다가 2023년 2월 14일 밤 9시 암 투병 끝에 향년 80세로 영면. (※ 더 이상의 상세 내용은 책에서 일독 要-블로그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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