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이경수_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발췌)/ 빙하기의 역 : 허수경

검지 정숙자 2023. 11. 2. 02:10

 

    빙하기의 역

 

     허수경(1964-2018, 54세)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

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전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과거와 미래의 나를 만나는 일/ 허수경, 「빙하기의 역(발췌) _이경수/ 문학평론가

  빙하기의 역을 상상하는 허수경의 상상력에서 지친 시인의 모습을 마주하곤 한다. '우리'가 만나는 장소로 얼어붙은 빙하기의 역을 상상할 만큼 시의 주체에겐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곳에서 '나'는 '내' 속의 할머니와 아주머니와 아가씨와 계집애와 고아를 다 불러내 만나고 비로소 대화한다. '내'가 거쳐 간 시간 속의 '나'와 묻고 대답하는 대화를 통해 비로소 '나'는 '나'와 화해할 수 있게 된다. 질문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나'는 소식도 전하지 않은 채 정처 없이 떠돌았던 것 같고 무심하게 살지 못해서 내내 아팠던 것 같고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고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가는 꿈을 꾸기도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내내 슬펐던 것 같고.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다고 시의 주체는 고백한다. 마치 유언처럼 노래하던 시인도 우리 곁을 떠났다. 철새처럼 날아가 버렸다. '내'가 그랬듯 우리도 심장이 아팠지만 아픈 심장을 부여안고 고통도 잘 느끼지 못하는 채로 너무 오래 살아가고 있다. 반가운 이들, 보고 싶은 이들에게 기별도 넣지 못한 채로, 빙하기의 역에서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만나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시의 주체는 헤어진다. 지친 자신과 마주하고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잘 가" 인사도 건네면서. 살아 있다는 기별의 기척을 얼어붙은 빙하기의 역이 아닌 곳에서도 나눌 수 있기를, 쓸쓸하지만 너무 쓸쓸하지 않게. (p. 시 10-12/ 론12-13)

 

   ----------------------------

  * 『계간 파란』 2023-여름(29)호 <권두 essay>에서  

  * 이경수/ 문학평론가,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불온한 상상의 축제』『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바벨의 후예들 폐허를 걷다』『춤추는 그림자』『다시 읽는 백석 시』『이후의 시』『너는 너를 지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백석 시를 읽는 시간』『아직 오지 않은 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