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459

추모-시) 쥐/ 김광림

추모>     쥐     김광림(1929-2024, 95세)    하나님  어쩌자고 이런 것도  만드셨지요  야음을 타고  살살 파괴하고  잽싸게 약탈하고  병폐를 마구 살포하고 다니다가  이제는 기막힌 번식으로  백주에까지 설치고 다니는  웬 쥐가  이리 많습니까  사방에서 갉아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신 헐뜯고  야단치는 소란이 만발해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운 세상을  살고 싶도록 죽고 싶어  죽고 싶도록 살고 싶어  이러다간  나모 모르는  어느 사이에  교활한 이빨과  얄미운 눈깔을 한  쥐가 되어가겠지요  하나님  정말입니다   -전문, (『현대시』 2004. 7월호)  ■ 김광림 시인이 2024년 6월 9일 타계했다. 향년 95세. 192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忠男이 ..

유성호_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전문)/ 국수 : 백석

국수     백석 (1912-1996, 84세)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넢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박순원_우리시 다시 읽기(전문)/ 오랑캐꽃 : 이용악

오 랑 캐 꽃  이용악(1914~1971, 57세)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흠에 살았다는 우리 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 으니 어찌보면 너의 뒤ㅅ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 랑캐의 뒤ㅅ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안악도 우두머리도 돌볼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 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처 드러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 갔단다 구름이 모혀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니어 흘러 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방울 받지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몰으는 오랑캐꽃두 팔로 해ㅅ빛을 막아줄께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은 1939년 9월 『인문평론』에 발표되었으며, 1947년 발행된 ..

추모-시) 그리운 나의 신발들/ 신경림

추모>     그리운 나의 신발들     신경림(1936-2024, 88세)    50킬로도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구를 싣고  꽤나 돌아다녔다, 나의 신발들.  낯선 곳 낯익은 곳, 자갈길 진흙길 가리지 않고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하면서도 그것들이 닳고 해지면 나는 주저 않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내다버렸다. 그 덕에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했다 고마워하면서.   이제 와서 내다버린 그 신발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한 것은 내가 아니고 그  신발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신발들에 실려 다니기 이전보다  지금 나는 세상이 온통 더 아득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폐기물 처리장을 찾아가 어정거리는 것인데,   생각해 보니 나는 ..

정과리_또 하나의 실존···(발췌)/ 그리고 오른쪽 눈을 감았다 : 전봉건

그리고 오른쪽 눈을 감았다      전봉건(1928-1988, 60세)    산골짜기에서 자랐다고 하였다.  그는 이따금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위로해주려고 했다.  그러면 그는 말하였다.         "소새끼가 죽었을게야······"  나는 그를 위로해주려고 했다.   탄대의 빈자리가 메워졌다.  몇 번이고 그는 철모 밑으로 숲을 들여댜보았다.  서로 가지를 펴는 나무와 나무 사이와  반사하는 금속과 일광도 보았다.   호壕들을 발견하였다.  그는 오른쪽 포켓에서 연필과 수첩을 끄집어내었다.   85밀리였다.  불발탄 한 알이 굴러내렸다.  나는 진출하였다. 11시 방향으로 40분간이 지나고······ 나는 정면 낮  은 능선위에서 가만히 낙하하는 따발총을 보았다.  나는 다시 왼쪽 눈을..

추모-시) 동경/ 노혜봉

추모>     동경     노혜봉(1941-2024, 83세)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金子의 슬픔을 알아주네  金子 홀로  모든 기쁨에서 동떨어져  푸른 하늘 저 편을 바라보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아는 이  저 멀리 있는데  눈은 어지럽고 내 마음 불타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金子의 괴로움을 알아주네*   金子는수선화다노란색만좋아한다金子는 호로비츠가연주하는슈만의꿈쌍쌍의호수를건너는백조다金子는피아노의시인쇼팽드볼작브람스브루흐의협주곡2악장이다金子는소펜하우어가가장아끼는제자다金子는젊은베르테르의슬픔의주인공그러나권총자살을미루어버린용감한처녀金子는젊은이의양지를찾아나선단두대의몬티金子의자존심은겨울바닷가에파묻힌열아홉개의소라껍데기金子는쟝모레아스나는흐느낌과눈물에젖은사랑을생각한다노란싸인지에적힌세종문화회관뒷골목판잣집서..

추모-시) 퀸/ 이초우

추모>     퀸     이초우(1947-2023, 76세)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언제나 어린 나를 손잡고, 난 아빠와 결혼할래, 내 고갱이 속에  아버지가 자꾸만 자라나는 여왕의 자리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어요.   내 머리카락은 광명단처럼 붉었고, 우아한 인형의 옷 같은 내 원피스, 격조 높은 붉은색 유화를   그렸지요 여왕이 돼 가던 나의 아버지, 전교 수석이란 날 유령처럼 희롱한 그 아이들, 함께했던 나의 하느님은 몸시 바쁘셨나 봐요.    내가 세상의 디자인을 구상할 때였어요. 어쩐지 난 두 개의 손만으론 내가 여왕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시시각각 우아! 하고 절규하곤 했지요. 그날 밤 나는 푸른 두 손바닥 위에 부처의 얼굴을 디자인해 넣었어요. 오! 나의 또 다른 손들.  ..

오형엽_조병화 시의 역설적 의미 구조 연구(발췌)/ 너와 나는 : 조병화

너와 나는      조병화(1921-2003, 82세)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캘린더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랑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샹들리에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

박상태_동화와 투사 그리고 이미지/ 사슴 : 노천명

사슴      노천명(1911-1957, 46세)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전문-   ▶동화와 투사 그리고 이미지(부분)_박상태  서정시는 개인의 희로애락의 감정 가운데서도 정제된 것을 풀어내는 형식이다. 또한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 정신 또는 시적 비전이 시인 자신의 세계관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캘더우드(James Caldewood)라는 문학 이론가에 따르면 시인이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동화(assimilat..

김태경_인권운동의 발상지 진주와 타자 연대성(발췌)/ 수박 : 허수경

수박     허수경(1964-2018, 54세)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