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장은석_오탁번 싱잉보울(발췌)/ 겨우살이 : 오탁번

검지 정숙자 2023. 10. 16. 23:10

 

    겨우살이

 

    오탁번(1943-2023, 80세)

 

 

  쥐코밥상 앞에서

  아점 몇 술 뜨다가 만다

  저녁은 제대로 먹으려고

  밥집 찾아 들랑날랑하지만

  늙정이 입맛에 영 아니다

  다 버리고 고향을 찾아왔는데

  입은 서울을 못 잊었나 보다

  야젓하게 살고 싶지만

  뭘 먹어야 살든 말든 하지!

 

  강풍경보가 발령된 겨울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요란하다

  다 낡은 분교 사택 지붕도 몽땅 날아가겠다

  낙향하여 선비처럼 산다고?

  그래 잘 살아라

  쌤통!

     -전문(p. 118-119)

 

  ▶오탁번 싱잉보울(발췌) _ 장은석/ 문학평론가

  실제 일상에서도 선생은 낙향을 결코 낭만적으로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식인이 말년에 낙향하여 자기 고향을 찾는다는 단순한 서사에 자신을 편입시키고 안주한다는 것이 허무맹랑한 이상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몸소 알고 있었다. 시골로 터전을 옮긴 것은 거창한 탈속이나 엘리트의 신화 추종이 아니라 생의 여러 '지날결'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

'쥐코밥상'과 '야젓하게 살고 싶지만'이라는 표현은 한 연에서 동시에 놓이며 서로의 감각을 더 북돋는다. 좀스럽지 않고 무게가 있게 살고 싶은 마음은 반찬 한두 가지만으로 차린 밥상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단출하고 보잘것없이 허술한 밥상의 이름 앞에 '쥐코'를 처음 단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쥐뿔이라는 말뿐 아니라 쥐와 관련된 말들은 우리 말의 여러 비유에 두루 동원된다. 그런데 먹을 것을 찾아 쥐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쥐의 이미지는 저녁을 제대로 먹고 싶어서 여러 밥집을 들랑날랑하는, 늙은이를 낮추어 부르는 '늙정이'의 처지와 겹쳐지면 더 실감이 난다. 또 이런 화자의 처지는 야젓하고 싶은 마음과 대비되며 극대화된다.

  하필 눈보라에 강풍도 몰아친다. 날아갈 것처럼 흔들리는, 낡은 사택 지붕과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앞에 화자의 무기력함은 더욱 강화된다. 낙향한 선비의 고고함도 눈보라에 통째로 흔들린다. "썜통!"이라는 말에 담긴 뉘앙스는 기묘하다. 전혀 몰랐던 일을 당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웃음기 섞인 말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 이 말에는 이럴 줄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일종의 자승자박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

  문을 닫은 애련분교에 '원서헌'이라는 명패를 달고 자리를 잡기 이전에도 선생은 퇴임 이후 거주할 여러 후보지를 미리 물색하였다. 그 첫 번째 후보지는 경기도 안성의 어느 시골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그가 잡지 『시안』을 열심히 꾸리던 때였고 나는 뱅뱅사거리의 사무실에서 그의 일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가끔 그곳에 동행한 적이 있다.

  정원에 울타리를 치고 땅을 파서 흙을 고르는 사소하고 단순한 일들이 그에게는 모두 익숙지 않아 그는 자주 누군가의 손을 빌 수밖에 없었다. (p. 시 118-119/ 론 118 * 119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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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토포스』 2023-여름(2)호 <작고시인 추모특집/ 오탁번 시인/ 작품론> 에서

  * 장은석/ 1977년 서울 출생, 2009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평론)으로 등단, 저서 『리드미카』

  * 오탁번/ 1943년 7월 3일 충북 제천군 백운면에서 태어남, 고려대 영문학과와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문학 박사학위 받음, 석사논문『지용시 연구-그 환경과 특성을 중심으로』는 1970년 당시엔 금기시된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를 처음으로 연구한 논문으로 주목받았으며, 1966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동화 부문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 1969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소설 부문 등단, 시집『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손님』『우리 동네』『시집보내다』『알요강』『비백』등, 

  소설집『처형의 땅』『새와 십자가』『저녁연기』『혼례』『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순은의 아침』『미천왕』『아버지와 치악산』, 2018년에는 등단작 『처형의 땅』을 비롯해 절판된 창작집과 이후 발표작까지 60여 편을 묶운 소설전집『오탁번 소설』전 6권을 펴냈다.

  평론집『현대문학산고』『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현대시의 이해』『시인과 개똥참외』『오탁번 시화』『헛똗똑이의 시읽기』『작가수업-병아리시인』『두루마리』등 다양한 산문집도 냈다.

  시 진문 계간지 『시안』 창간(1998~2013, 15년), 2008`2010년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2020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수상내역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김삿갓문학상(2010),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상 시 부문 대상(2011), 목월문학상(2019), 공초문학상(2020), 유심문학상 특별상(2020).

  오탁번 시인은 2003년 고향인 충북 제천시 백운면의 한 폐교(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에 자신의 문학관을 겸한 '원서헌遠西軒'을 열고 부인 김은자(전 한림대 교수) 시인과 함께 거주하며 자연을 벗하는 삶을 살다가 2023년 2월 14일 밤 9시 암 투병 끝에 향년 80세로 영면. (※ 더 이상의 상세 내용은 책에서 일독 要-블로그 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