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문철수_시로 보는 세상/ 집 한 채 : 임강빈

검지 정숙자 2023. 9. 29. 01:08

 

    집 한 채

 

    임강빈(1931-2016, 85세)

 

 

  하얀 길이

  다 끝나지 않은 곳에

  집 한 채

  쓰러질 듯 서 있다

 

  담도 대문도 없는

  이 집 주인은 누구일까

  신록에 싸여

  오히려 고대광실이다

 

  멀리 뻐꾸기가

  한데 어울린다

  허술한 집 한 채

  꿈속 궁전 같다

   - 시집 『집 한 채』(황금알, 2007)

 

  ▶시로 보는 세상 _문철수/ 본지 발행인

  서울이라는 곳에 밤을 가릴 지붕 하나 가지려고 사투를 벌인다. 밀려나면 더 이상 발붙일 곳 없는 유랑민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생의 목표가 되어 삶을 송두리째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빈 몸으로 돌아가는 이 적지 않다. 어쩌다 빈 자리 하나 차지했지만 개발이라는 명분에 더 멀리 쫓겨나기도 한다.

  

  만약, 육신의 집이 아닌 넉넉한 마음의 집을 가지기 위하여 생을 투자한다면 어땠을까. "하얀 길이/ 다 끝나지 않은 곳에" "담도 대문도 없"이 "쓰러질 듯 서 있"는 "집 한 채" "오히려 고대광실이다" 지상의 삶이 끝나는 곳에서 쓴 자서전 한 줄을 '고대광실'이라 쓸 수 있다면.

 

  물질에 지배당하고 자본 계급의 노예가 되어 허둥대면서도 입으로는 뻔뻔하게 허울 좋은 방하착放下着을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역겹다. 지랄하지 마라. "담도 대문도 없는" 빈 마음을, 다 내어 줄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긴 "꿈의 궁전" 아닌 감옥일 뿐이다. (p.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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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P. S』 2023년-가을(3)호 <시로 보는 세상> 에서

  * 문철수/ 시인,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