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3 4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양순모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양순모/ 문학평론가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희생 제의와 공통의 전제를 공유하지만, 비극은 그야말로 문학답게, 종교와 구별되는 문학만의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신들의 악마적이고 파괴적인 양태에 대한 경험은 '비극'과 '제의' 모두"에 공통적인 것으로, 다만 희생 제의는 '종교'적인 신을 자비로운 신으로 전환,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이 악마성과 파괴성을 "회피"하게끔 만든다. 또한 희생 제의는 당면한 폭력적 상황과 관련해 인간의 모든 권리와 책임을 신에게 양도함으로써, 철저히 "종교"적인 태도로서 당대의 악마적이고도 파괴적인 국면을 통화해 나간다. (해설, p. 147) ---------------------..

한 줄 노트 2024.07.03

파종 외 1편/ 정우신

파종 외 1편     정우신    내 머리에 꽃 피었는지?   소각장에서 말했지  어설피 때리지 말고 완전히 죽이라고  장난을 장난으로 끝내면  내가 죽을 거라고   너의 판단은 늘 현명했던 것 같아   친구야 난 그 시절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후퇴한 듯해   팬지에 검은자를 흘리고 간 것이  난 너라고 믿는다  마음이 약한 네가 마음이 더 약한 나에게  들려줬던 말들   계속 맞다 보면 주먹이  검은 원으로 보이는데  그럴 땐 더 움츠려서  점이나 씨앗이 되라고   가볍게  더욱 가볍게  치솟으라고   친구야 넌 똑똑하니까  답을 줄 수 있지?   저 쥐새끼 같은 눈알을 어디에 심어야 할지 말야      -전문(p. 100-101)    ------------------    일용직..

미분과 달리기/ 정우신

미분과 달리기      정우신    바람의 얼굴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봅니다   염소가 발굽을 긁고 있네요   지푸라기를 보다가  콧김이 느껴져  뺨을 긁었습니다   트랙을 달리다 보면  앞니가 시리고  오른쪽 무릎이 절룩입니다   신발 끈이 풀리면 기분이 좋습니다  바닥을 자세히 볼 수 있으니까요   금이 간 곳을 한참  들여다보면   개미는 보이지 않고  누군가 술에 취해  골목을 헤매고 있습니다   날벌레를 머금은  가로등  내 허벅지로 퍼지고   뒤를 보지 않고 달리면  지붕 옆으로 무지개가 놓입니다   나는 지금 트랙을 비집고  자라는 풀   내가 흔들리면  염소가 다가옵니다   염소는 트랙에서  들판을 보고  들판은 별을 복사합니다   개구리는 별과 별이  부딪치는 소리를 냅니다   누군가..

천수답/ 윤경재

천수답     윤경재    카메라를 메고 다닐 때  나는 천수답이 되는 거였다  햇살이 소나기로 쏟아져 내려도  나의 얄팍한 감광지는  찰나 한 조각만을 겨우 건질 뿐  그와 나 사이의 프레이밍  아무리 절묘하게 구도를 이리저리 잡아도  없는 것을 찍을 재주는 없다  나는 천수답, 주는 것만 받아먹을 뿐  인공강우는 실험실에서만 가능한 일  돌아와 초록빛 여행을 정리하면서  그때의 향기와 마음이 못내 아쉬워  또다시 떠남을 떠올린다  빛의 진심은 다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한 꺼풀 감추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전문(p. 88)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윤경재/ 2007년『만다라 문학』 & 2008년『문예사조』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