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사진신부를 기리다/ 데이지 김

검지 정숙자 2024. 3. 3. 01:15

 

    사진신부를 기리다

 

     Daisy Kim

 

 

  흰 옷고름으로 앞섶을 동여맨 처녀들이 날카로운 파도의 발톱을 타고 거친 생계의 물고개를 건너왔다

  홑겹 치맛자락을 검정 탄식으로 여민 혼인 예식

  항구의 모래밭에서 야자나무 열매는 조롱조롱 잔치처럼 벙글었다

 

  이름도 나라도 빼앗긴 사진 속 신랑은 빈 냄비처럼 달아오른 아열대의 기후 속에서 갈라진 구릿빛 맨발로 바닥을 헤치며 끝없는 설탕섬을 메우고 있었다

 

  피맺힌 사탕수수 밭에 밤이 오면 어린 신부는 해진 작업복에 질긴 삶 한 겹을 덧댄 삯바느질로 독립자금을 모았다 흙먼지를 껴입은 대낮 노동의 고된 지문이 닳아갔다 

 

  서툰 이국어를 목구멍으로 삼키고 끙끙 신음 소리 같은 우리말로 아리랑 고개를 꺼억꺼억  넘기면 목메인 세마치장단이 목놓아 울 곳을 찾아 웅크린 해변으로 와 누웠다

 

  애국단을 조직했던 길고 긴 와이아와의 진주 같은 해안*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무릎으로 희망을 걷던 발자취를 따라 독립을 열망하던 핏빛 독립선언서가 걸렸던 독립문화원을 지난다 태극기를 걸었던 국기봉과 무명 애국지사들의 추모비 밑에는 쪼개진 코코넛이 전쟁의 역사라는 듯 살이 녹아내린 진물을 흘리고 있다

 

  신들이 머문다는 섬

  나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대한부인회를 이끌었던 내 할머니 조선 신부를 기리는 문장을 물너울 지는 바다의 살결에 의무처럼 기록한다

  수평선은 높고 낮음 없이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듯 한 줄을 긋고 있다

 

  백 년을 넘은 이민사는 사탕수수의 모가지를 바로 세우고 속박을 벗은 독립의 뿌리는 내 몸에서 봄의 혈관으로 뻗어나간다

 

  외지의 꼿꼿한 태양 아래

  사진 신부의 무거운 역사는 파도처럼 부서지지 않는다 

 

  당신에게서 내게로 흐르는 핏줄의 근원이 바다의 틈을 촘촘히 메우고 있다

      -전문-

 

    * 하와이를 지칭하는 원주민의 말

 

  해설> 한 문장: 이 시집을 읽으면 알게 되겠지만, 김 데이지 시인은 한국 태생의 미국 하와이 이민자이다.// 이민 1세대의 결혼식 "사진 신부"의 묘사를 통하여 화자는 하와이 디아스포라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불가피하게 시작된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현재의 하와이 디아스포라는 "이름도 나라도 빼앗긴" 1세대 피식민 주체들이 "생계의 물고개"를 넘어 정착했던 "피맺힌 사탕수수밭"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목숨을 보전하기조차 힘든 와중에도 "독립자금"을 모아 반식민해방 투쟁을 전개하였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이와 같은 역사화는 고난의 자랑스러운 목소리들을 호출함으로써 현재의 디아스포라 주체를 당당하게 서게 한다.

  김 데이지 시인은 디아스포라 주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탈 디아스포라의 시적 출구를 찾는다. 그에게  디아스포라는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은유와 상징의 시적 언어로 성취된다. 그의 언어는 인류의 보편적 불평등을 포착함으로써 디아스포라의 편재성을 드러내며, 디아스포라를 역사화 함으로써 디아스포라를 탈신비화하고 탈영속화한다. 이 시집은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p. 시 98-100/ 론 127// 139-140) <오민석/ 문학평론가 · 단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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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올리브 숲』에서/ 2024. 2. 5. <미네르바> 펴냄 

  * Daisy Kim/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