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왜/ 이용헌

검지 정숙자 2024. 3. 4. 00:31

 

   

 

    이용헌

 

 

  왜가리는 왜 지은 죄도 없이 한 발을 들고 서서

  한 발을 허리춤에 몰래 감추고 서서

  둑 너머 하늘이나 바라보다가

  서서히 서서히 어둠에 갇히는지

 

  왜가리는 왜 어둠에 물어본 적도 없이

  어스름 강물에 발을 담그고 서서

  어룽어룽 일렁이는 발등이나 내려다보고 서서

  스르르 스르르 그루잠에 빠지는지

 

  잠결에도 미처 다 못 감은 눈은 무겁고

  물속에서도 살을 에는 바람은 불어

  한 번쯤 기우뚱, 몸을 놓치기라도 하련만

  왜가리는 왜 물낯처럼 흔들리는 법도 없이

  한 발로 곧추서서 긴 밤을 견디는지

 

  밤은 삼라를 가리고 꿈은 만상을 그려서

  한 번 나온 꿈속은 다시 잇지 못할 터이지만

  왜가리는 왜 돌아갈 거처도 없이

  저 홀로 깨었다가 저 홀로 입선立禪에 드는지

    -전문(p. 123)

 

  시인의 말

  한 선비가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까닭을 물으니 "저는 어렸을 때 눈이 멀어 십수 년을 살아왔는데 오늘 갑자기 앞이 훤히 보여 너무도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나,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비슷해 집을 도저히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선비가 "다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 내가 생각하고 끄적거리는 건 시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p.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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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신작시> 에서

  * 이용헌/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