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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 정혜영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 레이크 루이스* 정혜영 어떤 광경 앞 언어는 사라지고 아무것도 극에서 극으로 향하는 신전의 지붕처럼 되풀이되는 한여름밤 악몽에 갇힌 것 같아 루이스, 추앙받아 마땅할 아름다움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호수에게 주었다 아담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듯이 우리의 언어가 아름다움이 얼어붙는다면 멀리 달아나야 하리라 허공에 음표를 매다는 카프카 미완의 문장처럼 들끓는 불안처럼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 봉우리들 순수한 것들은 제 체온에 놀라 불붙는 수은주가 된다 빅토리아 빙원과 에메랄드 호수 서로에게 귀 기울여 저 먼 곳을 향하는 경사면이 되었다 신전은 비어있고 루이스, 그녀는 호수에 갇힌 눈물이 되었다 아니, 호수는 루이스의 눈망울이 되었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캄캄한 영원, 투명한 ..

김인환 에세이_『근대의 초상』/ 주요 노트 30구절

『근대의 초상』_주요 노트 30구절 김인환/ 문학평론가 1.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을 참된 사람, 정직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논리학의 방법은 언어분석이지만 논리학의 목적은 언행일치에 있습니다. (p. 7) 2.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이미 알려진 모든 지식과 미리 알고 있는 모든 개념을 철저하게 끊어내면서 의식 안에서 새로운 의미가 구성될 때까지 완강하게 기다리는 선험적 단계의 내면화 과정을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합니다. (p. 8) 3. "정신분석은 평전 연구에 필요하고 자본론은 문학사 공부에 필요하다. 공부는 대충하면 안 되고 항상 세부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30년 동안 매년 했어도 한문이나 ..

한 줄 노트 2024.03.22

황홀한 작별 외 1편/ 김정인

황홀한 작별 외 1편 김정인 상원사 가는 길 조릿대 군락에 대꽃이 피었다 꽃 쓰다듬고 냄새를 끌어보고 싶었는데 스치는 길 아쉬워 몇 번을 뒤돌아보았는데 이듬해 앙상한 싸릿대 되어 꽃도 댓잎도 다 죽었다 꽃이 활짝 피면 바짝 붙어 따라와 떠나가는 시간 무엇이 죽을 만큼 힘들어 피를 토하듯 마지막 꽃을 피웠나 조릿대의 시간은 존재하던 것들이 건너가는 시간 꽃의 시간은 황홀한 작별을 준비하는 시간 처절함도 노을로 지고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읽어도 읽어도 여전히 깨우치기 힘든 경전 한 구절 몸 벗은 조릿대가 귓속말한다 "모든 존재는 나와 다르지 않다" -전문(p. 80) ------------------ 낙타커피 가 있는 문학관에서 낙타커피를 마신다 모래바람 수없이 삼켜 뱃속까지 하얀 낙타가 커피를 내리고 있..

느닷없이 애플파이/ 김정인

느닷없이 애플파이 김정인 그 섬에 온 김에 소문난 애플파이를 맛보기로 했다 사과를 닮은 파이 한 개를 넷으로 나눴다 사과는 분수를 좋아해 다행이라며 억지로 생각도 욱여넣었다 리조트 앞 바닷가로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푸른 파도는 빨간 파이의 맛을 알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영감의 원천은 뭐든지 갖다 붙일 수 있는 것 트럼프 병사들이 카드 꾸러미가 되는 명장면은 혼을 담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이야기 나는 앨리스처럼 토끼를 쫓아가 기상천외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느닷없이 애플파이'라는 팻말을 포크로 콕 찍어준 그 낱말은 따라가고 싶었다 푸른 바다 위 갈매기는 끼룩끼룩 날고 혀끝을 스치는 맛, 빨간 애플파이 돌아오는 길 포크를 봉돌 삼아 찌를 맞추고 생각의 부력을 띄운다 끌어 올려진 문장은 세상 ..

몇 방울의 찬란/ 문현미

몇 방울의 찬란 문현미 내 속의 마른 뼈들이 서걱거린다 바람 몰아칠 때나 세찬 비 가슴을 두드릴 때나 햇볕의 민낯이 눈부신 날이든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실금이 간 뼛조각들을 모아서 조심조심 날카로운 속도로 맞추어 본다 초록 그늘 울창한 나무로 서 있다가 침묵으로 말 건네는 바위로 덩그러니 앉아 있다가 흔들리며 떠 있는 조각배로 흐르다가 기억들의 창가에 아른거리는 빛의 잔영마저 간간이 마음 우물로 고여 드는 때, 두레박 줄 깊이 내려 물 한 자락 길어 올린다 몇 모금 생수의 갈증으로 생기를 찾고 새로운 피를 받은 뼈들이 하늘을 향해 날개 펼치는 소리가 푸른 속도로 웅웅거리고 오랜 묵상과 눈물의 기도 너머 몸의 사원에서 빠져나온 언어들은 푸르게 돋아난다 최초의 노래인 듯, 낯선 고백 몇 방울 -전문- 해설>..

서글픈 택배/ 최해춘

서글픈 택배 최해춘 앞산 소쩍새 소쩍소쩍 울던 날 밤 가랑잎 같은 몸을 가누며 할매는 빈 집으로 돌아왔다 희미해진 정신 줄은 삭은 빨랫줄 마냥 위태하지만 효심 많은 자식들 사그랑주머니*가 된 홀어미 모신다며 수건돌리기 하듯 데리고 다닐 때 어미보다 먼저 챙긴 인감도장은 이 손 저 손 멱살 잡힌 채 끌려 다녔고 잡초만 무성해진 논밭들은 아웅다웅 주인 다툼에 망연자실이다 아직도 삭은 빨랫줄에 매달려 바람 불지 않아도 꼬이고 얽히며 펄럭거리는 자식들 그래도 평생 살던 집이 좋을 거라며 텅 빈 집으로 택배처럼 돌려보내진 할매의 집에는 밤이 깊어도 불이 켜지지 않았는데 초저녁 울던 소쩍새 끝끝내 목이 메어 울음을 멈추었다 -전문(p. 27) * 사그랑주머니: 죄다 삭은 주머니라는 뜻으로, 속은 다 삭고 겉모양만 ..

눈부신 서릿발 외 1편/ 문현미

눈부신 서릿발 외 1편 서대문 형무소 문현미 은하의 강을 건너온 햇살이 낡은 벽돌 틈새까지 스며든다 역사의 비밀이 기지개 켜는 시간 높은 담벼락 아래 오종종한 새싹들 제 뿌리의 완강으로 어둠을 견디며 어김없이 눈뜨는 봄날 혹한의 겨울 땅을 뜷고 어여쁜 풀꽃들 온 세상에 가득하리니 강풍이 결코 무섭지 않아서 폭우는 더더욱 두렵지 않아서 다만 목숨 걸고 지키고 싶었던 푸르디푸른 강산이었다 피맺힌 울음 알알이 박힌 하늘 아래 울려 퍼졌던 마지막 서릿발 말씀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전문(p. 68-69) * 소천 직전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말씀 ------- 낮달 한 번뿐인 오늘과 내일이 다음 계절의 눈부신 연두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나와 너, 그리고 ..

시간의 연대 외 1편/ 강영은

시간의 연대 외 1편 강영은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 궁극으로 치닫는 마음 마음 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 허공으로 치솟는 몸 돌탑은 알고 있었다. 한 발 두 발 디딜 때마다 무너질 걸 알고 있었다. 무너질까 두근거리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므로 조그만 돌멩이를 주워 마음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태어나기 전의 돌탑을 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 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 돌멩이가 자랄 때까지 돌탑이 될 때까지 -전문(p. 40-41) -------------- 너머의 새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으로 나눕니다. 방향이 틀리면 북쪽과 남쪽을 강조하거나 죽음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나의 흉곽을 새장으로 설득하기도 합니다. ..

인형들의 도시/ 강영은

인형들의 도시 강영은 언제부턴가 왼쪽이 아프다. 기침하면 왼쪽 가슴이 쿨럭이고 고개 돌리면 왼쪽 등허리가 땡긴다. 어떤 권력이 점거했는지 어떤 부조리가 관여했는지 미세먼지 같은 대답을 듣는 날에는 목줄까지 뻣뻣하다. 내 몸의 기득권자는 누군가요. 내가 아닌가요? 당귀즙을 앞에 놓고 외쳐 보아도 단단한 근육질에 묶인 도시는 오른쪽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어쩜 여기는 인형들의 도시일지 몰라, 선반 위에 놓인 목각인형처럼 사지를 내려놓고 빙그르르 돈다. 누가 총을 들이댄 것도 아닌데 네, 네, 그렇군요, 유리 벽에 박힌 나를 보려고 선 채로 돈다. 움직이는 벽에 애걸하듯 산 채로 돈다. 고통의 계단을 높이는 건 누구일까, 계단 위에 놓인 목에 붕대를 감고 계단 아래까지 내려간다. 어느 쪽에도 유리한 증언은 하지..

소서(小暑)/ 노승은

소서小暑 노승은 여름은 크거나 작거나 한 칸 방은 무중력의 세계 땀도 흐르지 않고 겨울도 없어서 무섭다 나는 내가 남긴 눈물 며칠째 뜨거운 감자를 먹고 있다 죽을 것 같아, 칠흑의 밤바다를 차가운 컵을 혀에 받아둔 첫눈을 퇴고 없는 시들을 불러낸다 소나기가 내려야 하는데 당신에게 건네줄 몇 개의 계절이 젖어내려도 찢어지는 대로 나부끼는 대로 살아남겠다고 다정한 인사를 해야 하는데 나는 약속장소에 나가는 대신 오늘의 날씨 속으로 도망치고 있다 -전문(p. 24-25)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펴냄 * 노승은/ 2005년『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시집 『나는 꾸부정한 숫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