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깊이와 애도의 시간(부분)
조디 피코,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
전해수/ 문학평론가
조디 피코의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는 동물학자 앨리스의 일지에 기록된 '코끼리의 슬픔을 이해하는 모습'을 통해서 애도의 방식을 보여준다. 2년간의 임신 기간을 거쳐 새끼를 낳은 코끼리는 분만 중에 새끼를 잃거나 새끼가 자연사하는 경우 더욱이 여러 날을 식음을 끊고 새끼 주변을 배회하며 오랫동안 맴돈다. 그때는 슬픔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어미 코끼리를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불문율,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거친 후에 어미 코끼리는 비로소 새끼 곁을 떠난다. (p. 184~185)
스토리를 간단하게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코끼리를 연구하고 돌보는 앨리스와 토마스 부부에게는 어린 딸 제나가 있다. 이외에도 기드언과 그레이스 부부는 코끼리를 돌봐주는 일을 거들며 앨리스를 돕고 있고,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네비는 그레이스의 엄마다. 네비는 기드언과 앨리스의 불륜을 목격하고 자살한 그레이스 때문에 앨리스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 그러나 네비는 코끼리 보호소 사건의 피해자로 코끼리의 발에 밟혀 죽게 되는데 이 사건 이후에 앨리스는 사라지게 된다. 코끼리 보호소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들은 이른바 그레이스의 자살과 제나의 행방불명, 네비의 죽음 그리고 사라진 앨리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연속극처럼 얽혀져 있다. (p. 185)
예전에는 사람들이 코끼리 무덤이 있다고 믿었다. 병들거나 늙은 코끼리들이 찾아가서 죽는 곳이 있다고 말이다. 그들은 무리에서 슬그머니 벗어나 먼지 자욱한 풍경 속을 느릿느릿 걸어간다고 했다. 우리가 7학년 때 배우는 그리스 신화의 타이탄들처럼, 전설에 따르면 그 장소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고 했다. 초자연적인 힘의 원천이자 세계 평화를 가져다줄 마법의 책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 무덤을 찾아 나선 탐험가들은 죽어가는 코끼리들을 몇 주씩 따라다니지만 사실은 원점회귀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어떤 이들은 그러다 영영 사라졌다. (조디 피코,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 9쪽)
제나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코끼리의 무덤'을 초두初頭에서 언급한다. 병들거나 늙은 코끼리들이 '죽음'을 향해 가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없다. 작가는 코끼리의 무덤을 믿는 건 미신이라 말한다. 정작 코끼리의 '무덤'은 존재하지 않고, 코끼리의 '죽음'은 초자연적인 힘 그 자체로 기억에 남겨진다. 코끼리들은 꽤 오랫동안(일반적으로는 6분 이상) 춤을 추듯 죽은 코끼리를 즈려 밟거나 그 주변을 배회하다가 그곳을 떠난다.
이 소설이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로 번역된 것은 바로 위 인용구절 때문인 듯하다. 제나의 시체가 발견된 곳이 아프리카 사바나 코끼리가 주로 다니는 길, 풀숲이었다는 점에서도 코끼리의 무덤과 제나의 무덤은 마주한다. 코끼리의 그것처럼 제나의 무덤도 실은 없다. (p. 186~187)
이 소설은 심령술에서 영혼을 신원伸寃하는 방식을 통해 감춰진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놀라운 반전을 거듭한다. 독특한 플롯(plot)과 이야기(story) 전개방식을 지닌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는 특히 결말의 반전이 진정 압권이다. 네 명의 화자는 결말을 위해 복선으로 설치된 장치들이며 네 명의 인물을 배치하여 전략적인 구조와 반전을 재차 확인하는 작가의 트릭(trick)과 구성법은 짜릿한 전율이 인다.
제나와 앨리스가 서로를 놓아주는 데에 10년이 필요했듯이 슬픔을 잊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애도의 시간은 남은 자에게는 삶을 다시 이어가야 할 이유를 진정 알게 하기 때문이다. 조디 피코의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는 슬픔을 이겨내는 것이 애도의 시간에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p.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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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 2022-봄(81)호 <예술가의 서재> 에서
* 전해수/ 2005년 『문학선』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1950년대 시와 전통주의』『목어와 낙타』『비평의 시그널』『메타모포시스 시학』『푸자의 언어』등, 현) 상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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