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여독/ 윤의섭

검지 정숙자 2024. 3. 9. 01:54

 

    여독

 

     윤의섭

 

 

  일주문을 들어서자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이번 여행은 무난하게 끝내기도 쉽지 않은 경우였다

 

  인생을 처음 길에 비유한 사람은 독에 대해 잘 아는 자였을 것이다

  걸을수록 독이 쌓이고 때로 풀렸다 다시 차오르고

  어떤 독은 미량이라도 살면서는 치사량이 될 수도 있고

 

  길에서 마주친 그 모든 유독성

 

  어쩌면 내가 독을 끼치는 독종이어서

  내 꿈이 누군가의 꿈을 죽였을지 모르고

  내 말이 누군가의 말을 매장시켰을지 모르고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독은 해독제도 없이 서로의 심장을 녹이고

 

  내가 잠시 머물렀던 풀밭은 시들어버렸지

  독단일 수도 있지 여름에서 겨울 사이는 떠오르는 게 없어

  시력은 점점 나빠졌고 풍경은 흐릿해지기를 포기하지 않았지

  불면증은 나의 독력을 증명해

  죽지 않으려고 수은에 중독되어 죽은 왕도 있다는데

  내 독은 내게서 살아남겠지

 

  사원을 둘러보고

  경내에 쏟아지는 빗물을 바라보고

  심장은 여전히 녹아내리는 중이고

  그것은 지독한

    -전문(p.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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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결』 2024-봄(창간)호 <신작 마당>에서

  * 윤의섭/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묵시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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