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고무인형 외 1편/ 조명신

검지 정숙자 2024. 3. 19. 03:13

 

    고무인형 외 1편

 

     조명신

 

 

  내일로 이어지는 날들이 텅 빈 운동장에 부는 차디찬 겨울바람보다 가슴을 시리게 한다 꽝꽝 언 대야 속에 밀어 넣는 바가지는 얼음을 깨지 못하고 그 위를 빙빙 돌고 찬물은 손가락 사이사이 성난 가시처럼 파고든다 마른세수하고 나온 거리엔 먼지처럼 눈이 내리고 케이크 상자를 든 들뜬 손들 너머 곱은 손으로 빈 박스의  테이프를 뜯어낼 때 리어카 위 멸치박스에도 눈은 쌓인다

 

    그리고 

 

  텅 빈 버스정류장 온열 의자에 앉아 해진 목장갑 겹겹이 낀 손 엉덩이 아래 밀어넣고 한숨 돌릴 때 울리는 핸드폰 소리

 

  여보세요

  엄마는 왜 그래

  내가 뭐 어쩐대

  그게 그렇게 아까워

  너는 참말··· 징하게 너무한다   

 

  내가 좀 필요해서 부탁하잖아 엄마 아직 아침, 점심도 못 먹었어야 평소에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함 듣는 둥 마는 둥 물어보면 대꾸도 않고, 버튼 누르는 소리나 내고, 그래 놓고 돈 필요하면 전화 넣는······

 

  엄마가 뭘 그렇게 해줬는데

 

  고물 한 수레 실어도 3,000원 받기도 어려분디, 리어카는 또 얼매나 무겁고 날은 또 얼매나 춥간, 손구락도 시렵고 발구락도 시려워야, 나도 낼모레 마흔이고 나도 육십 중반여, 니는 엄마가 불쌍치도 않어

 

  아 몰라, 지겨워

 

  길 건너 시장 입구에서 빈 고무함박을 옆구리에 낀 낯익은 얼굴 하나가 이름을 부르며 건너온다

 

  수제비 좋아하지

  수제비요

  뜨신 거 먹으러 가자

  어디서 한데요

  가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설 때 파도처럼 밀려났던 인생이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간다 수없이 부딪혀 이젠 뼈 마디마디가 부서진, 바람 빠진 고무인형 둘이 시장초입 국시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p. 11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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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를 뽑을 수 있나요?

 

 

  문간방 선희는 종이뽑기를 잘했어

  문어발 뽑기는 더더욱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그냥 촉 같아

  오죽하면 뽑기 집 아줌마가

  야, 넌 하지 마, 했겠어

  사실 선희는 문어발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백 원이 생기는 날엔 뽑기를 했어

  게임당 50원 하던 문어발 뽑기 앞에서

  심호흡하고 손가락 끝에 기를 모으는 척 뽑기 판을 탐색했지

  점찍어 둔 종이가 있었지만

  주인아줌마와 또래 남자애들에게 보이는 소맨십이었지

  역시나 백발백중

  제 손바닥보다 큰 문어발 두 마리 들고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삐그덕,

  철제대문 뒤로 밀고

  방문 앞에 앉아 나무판에 낚싯바늘을 꽂던 엄마가 반겨주면 

  내보인 문어발 두 마리

  어디서 났냐

  부모님이 문어발 장사하는 짝이 줬어

  얼버무리며 문어발을 구워 와선

  제일 긴 다리 뜯어 엄마 입에 넣어주지

  너도 어서 먹어

  엄마를 보며 빙그레 웃던 선희

  오늘도 참새방앗간처럼 김제시장통 초입 건어물 가게를 서성거려

  열 배는 더 큰 문어발들

  주인여자에게 씁쓸한 미소로 화답하곤

  청과물 파는 곳으로 걸어가

  주머니 속 지갑을 꽉 움켜쥔 채로

  이젠 큰 걸로 사드릴 수 있는데

  수없이 혼잣말해

    - 전문(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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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엄마를 뽑을 수 있나요?』에서/ 2024. 3. 10. <시산맥사> 펴냄 

  * 조명신/ 1980년 전북 김제 출생,  2022년 『문학과의식』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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