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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연습(生存練習)/ 서상만

생존연습生存練習 서상만 사람들은 하늘에 매달리거나 물에 둥둥 뜨면 가벼워진다 그 누구의 몰골이냐 정신 놓지 말아라, 魂 줄을 놓는 순간 길 잃은 별똥별이 되거나 천근만근 무거워진 폐선으로 오래오래 갈앉아 물귀신이 되는 거다 끙끙 앓는 소리라도 내 보렴 살아있다는 건 숨 쉬는 것 숨만 쉬면 죽지는 않는다는 것 존재 증명이란 죽기보다 더 어렵다 -전문- 해설> 한 문장: 1982년 41세에 『한국문학』으로 등단한 서상만 시인은 2007년 첫 시집 『시간의 사금파리』를 발간한 이후 제15시집 『생존연습』(2024)을 간행하기까지, 지극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시작詩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앞서 한 문장으로 가늠해 본 시인의 이력履歷에서도 짐작되듯이 비교적 늦은 등단과 25년 만에 첫 시집을 상재한 사실을 주목..

솔방울 소리 천둥 치는 밤/ 최동호

솔방울 소리 천둥 치는 밤 최동호 폐교 작업실에서 혼자 잠들면 달밤에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 나고 몇 밤 더 지나면 지붕 뚫어져라 천지를 때리는 솔방울 소리 야심한 밤 폐교에서 메아리칠 거요 -전문(p. 7)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펴냄 * 최동호/ 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미래서정, 열두 번째의 의미, 어디로 가란 말이냐(전문)/ 정혜영

미래서정, 열두 번째의 의미, 어디로 가란 말이냐 정혜영/ 시인, 서정시학회 회장 『미래서정』 열두 번째 앤솔로지다. 열둘, 의미 있는 숫자이다. 소년이 소년이 아니게 되는 나이. 마그네슘(Mg)의 원자번호. 탄소의 원자 질량은 12, 이것은 다른 원소의 원자 질량 지정의 기준이 된다. 연필 한 다스는 12자루, 12월은 그레고리력의 마지막 달, 올림포스 12신. 예수의 열두 제자. 음악에서 한 옥타브는 12개의 반음 간격이다. (피아노 건반이 열두 개라는 뜻) 12는 완전한 주기. 우주의 질서를 상징한다. 3×4=12에서 3은 신, 4는 인간을 의미해 12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조화를 의미한다.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는 땅의 토질이 나쁘다는 것을 말해 ..

권두언 2024.03.28

가라앉히기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노래/ 김산

中 가라앉히기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노래 김산 내일의 심장은 어떤 모양으로 두근거릴까 이건 비문이어서 오늘의 뉴스는 적확하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날씨를 사랑해 폭염 혹은 폭우 그리고 기꺼이 외따로운 것들 올해는 장마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짧은 비가 다녀갔고 이 세계는 잘 구운 바게트 같아 한낮, 카페에 앉아 있는 쌍쌍의 연인들 사막 같아,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마음들은 어디서 불어온 것인가, 이런 평화로운 소란이여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 이별과 가까워지는 거야 알면서도 모른 척 재잘거리는 회색앵무새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을 존중해 그렇다고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어두운 것들, 빛을 잃어서 더 환해지는 저녁이여 저 가로등은 한 번도 고갤 들은 적이 없어 슬픈 목이여, 구부러진..

쑥을 캔다/ 이준관

中 쑥을 캔다 이준관 들녘에서 아낙네들이 쑥을 캔다 손에 쑥물이 밴다 "봄볕 참 좋지예" "하모, 그렇고말고예" 야들야들한 쑥의 허리를 가진 그녀들 그녀들의 몸에서 코 끝을 톡 쏘는 알싸한 쑥 향기가 난다 어느 집에선가 쑥국 끓이는 쑥빛 연기 몽실몽실 솟을 것만 같은 봄날 쑥국 한 그릇에 아이들은 해 바른 양달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쑥국새처럼 노래 부르며 고무줄뛰기 하겠다 -전문(p. 17) ------------------------- * 【한국시인협회 제65회 정기총회 부클릿】에서/ 시상식 2024. 3. 27(수)_16 : 00. 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 프레스 클럽 * 이준관/ 1949년 전북 정읍 출생,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산, 1974년『심상』 신인..

종소리/ 손민달

종소리 손민달 땅 속에는 거대한 종이 있음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많은 새싹들이 한꺼번에 눈 뜰 리 없지 수많은 매미들이 일제히 세상에 나올 리 없지 그래서 굼벵이도 씨앗도 제 몸에 귀가 있다고 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큰 종을 사람이 친다는 말이 있어 혹독한 겨울 지나 온 땅 간질이는 새싹 돋는 일과 숨 막히는 여름 시원하게 울리는 소리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겠어 사람들은 큰 종을 울리기 위해 수신자 없는 편지를 눌러 쓰고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동안 울기도 한다지 어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이 스스로 종이 되어 울기도 한다는데 어느 따뜻한 봄날 갑자기 울렁이는 가슴과 여름밤 내리는 소나기에 누군가 그리워 우는 것이 명백한 증거라고 땅속에는 사람들이 울리는 소리가 사람..

이문동 도루묵 지붕/ 노해정

이문동 도루묵 지붕 노해정 비술나무 서 있는 동네 어귀에 소복한 눈 위로 삽 긁는 소리 골목 모퉁이 작은 가게엔 담배 과자 김치 콩나물 없는 게 없고 새끼줄 같은 골목길로 들어가면은 도루묵 만한 하숙집들이 연탄 내를 여기저기 연신 풍겼다. 기차가 오가는 철길 건널목 댕댕댕 소리 맞춰 늘어선 행렬 플랫폼에 올라 바라보면은 흰 눈 맞아 하얗게 된 여러 두름의 도루묵 지붕들이 연기를 냈다. 즐비하던 하숙집들 사라져 가고 철길 건널목도 없어졌지만 지금도 가끔, 눈 오는 날엔 도루묵 지붕 그리워서 전철을 탄다 -전문(p. 129-130)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펴냄 * 노해정/ 2023년『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수상

모자 벗은 여인/ 황규영

모자 벗은 여인 황규영 여인이 모자를 벗고 왔다 처절했던 여인의 암 투병 기간 입안이 붇고 곳곳이 헐어 물 한 모금 삼키기 어렵고 온몸의 피부는 불난 듯 붉게 벗겨지고 근육 찢기는 듯 통증에 불면의 긴긴밤 지나고 이제 막 자라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아래로 깊어진 눈빛 자잘한 것에도 우러나는 감사의 인사 병 얻기 전 까칠하던 성격은 간데없이 모든 것이 고맙다는 사람 등뼈가 옆으로 휘어 삐딱하게 앉은 채 피식 웃는다 상처 덮어주던 모자 벗고 고통의 굴레 벗어던진 여인 똑바로 앉기도 어려운 굽은 등에 내 손길 머문다 생의 한가운데서 몸부림치는 시간을 지나 한 꺼풀 고통의 껍데기 벗었다 -전문(p. 118)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

희고 노랗게 남은 너를 유리구에 두었다/ 최정진

희고 노랗게 남은 너를 유리구에 두었다 최정진 심장 간 수치가 매우 높고 당뇨도 있는 것 같아서 수의사가 더 살기 어렵다고 했다 거의 매일 보고 없는 꼬리를 흔들며 집에서는 어디든 따라다녔는데 체중이 줄어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료 맛있게 먹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것만 보였다 사람 손타는 것을 꺼리는 고양이였다 가기 전 몇 달 동안 자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한참 쳐다보고 처음 가족이 된 날처럼 왜 발등을 베고 잠들었는지 아프다가 통증이 덜하면 내 생각이 난 것일까 통증이 심할 때였던 것일까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한 배웅 같은 것일까 고양이를 보내고 집 청소를 했다 뭉쳐 빗겨 냈던 희고 노란 고양이 털이 나왔다 그것을 투명한 유리구에 두었다 죽어서도 귀엽게 남은 고양이를 볕 드는 창가에 두었다 알아차리..

파김치 1/ 신영조

파김치 1 신영조 나는 더욱 맵게 살기로 했습니다 파김치가 되어 저녁 기차로 남아도 어머니도 늘 그랬습니다 축 처진 어깨가 저녁 그늘의 선로에 매어 달리던 저녁이 반복되는 날이 길어질수록 내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파김치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파김치가 매운 사랑으로 익어서 나는 진한 김치 국물 한 수저로 가라앉을 눈물이 눈 속에 고여 있을 때는 세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눈 속을 떠나는 순간 세상이 너무나 환하게 보였습니다 파김치 속을 들여다봅니다 뽑아서 자르고 쥐었다 휘저어 놓아서 버무려진 하루치의 양념 시퍼런 눈물이 숙성한 푸른 강나루 내 몸에 들어왔다 눕는 바람에 오늘도 나는 파김치가 됩니다 오늘도 나는 시퍼런 기차가 됩니다 -전문(p. 78-7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