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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타고 나면/ 전길구

그림자가 타고 나면 전길구 바람 없는 여름 한낮 그림자가 타오르고 있다 그림자가 타고나면 무엇이 남을까? 열 살 무렵 도시 구경하겠다고 찾아간 대구에 짐 자전거로 빙과 배달을 하던 삼촌이 있었다 회색 벌판 위에 군림君臨하던 태양은 자전거 뼈대를 달구고 한낮 짧아진 그림자는 숨 가쁘게 페달을 밟았다 까맣게 탄 등허리를 구부리고 달그락거리며 늦은 저녁을 삼키던 삼촌 집도 사고 트럭도 사고 포도 넝쿨 같은 시절도 있었지만 칠순 앞에 얻은 것은 폐암肺癌 곁을 떠난 적이 없던 매연과 고단했던 검은 저녁과 타오르던 그림자는 응고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산속에 눕던 날 유독 밝았던 한 사람 몫의 햇살 그림자가 타고난 자리에는 하얀빛만 남아있었다. -전문(p. 103-104) -------------------------..

고통의 간격/ 최은진

고통의 간격 최은진 농담이었다고 하면 빛이라도 생길까요 오늘, 지난밤에 당신의 안테나는 무사합니까 언제든 누를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끝없이 늘어나는 발목으로 당신의 파문을 훔칠 겁니다 소리보다 먼저 가 닿은 빛의 속도는 당신의 손바닥을 파고들겠죠 이른 아침이면 검게 그을린 고목에 기댄 소문들 아파트 잔여세대 분양 현수막이 파격으로 내몰리고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문장 아래 이 년 동안 빌려 산 생生은 궁극으로 치닫습니다 저녁이 뱉어낸 하늘에 번지는 어둠 빛보다 빠르게 가닿는 귓속말 이제 당신의 안테나를 늘려 보아요 진담을 말한다면 거울 속에 당신 어둠을 깨워줄 환한 빛이 생길까요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전문(p. 86-87) 겨호 ------------------------- * 서정시학회 『미래..

개와 늑대의 나라/ 정우진

개와 늑대의 나라 정우진 우리라는 말이 낯설다 사람과 불편은 이제 거의 같은 말 노이즈 캔슬링의 제거 대상은 나 말고는 전부 비집으며 실례한다고 말할 때 들렸는지 모르겠다 입만 벙긋거렸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나한테 미안하거나 고맙다고 했을 수도 불편 불만 상처 죽음 우리의 탓은 아닌데 뉴스는 자꾸 무서운 얼굴들만 보여준다 도서관소음 커피숍소음 포근한 타인이란 적당히 저만치 너무 가까운 모르는 사람의 숨소리 너무 먼 집에 가는 길 내가 마음껏 다닐 수 있는 공간은 몸속밖에 안 남아 캔슬캔슬 귀 닫고 눈 닫고 입 닫고 걸을 따름이다 이것도 우리의 탓은 아닌데 -전문(p. 70-71)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펴..

파동/ 이영란

파동 이영란 비 오는 날 나무 밑은 예민하다 불규칙 파동이 섞이는 물 고인 곳엔 희끗히끗 나무 그늘 밖의 하늘도 보이지만 불규칙도 한참을 지나면 규칙적인 소리가 된다 젖은 나뭇잎들엔 빗물이 달라붙어 있고 나무의 대기권을 거친 빗방울들이 굵게 뭉쳐져서 떨어진다 어느 슬하라도 궂은 날엔 다 예민하다 말 없는 곳의 파동들이 비 내리는 한나절을 끌고 가듯 한 슬하의 투정들도 눅눅한 가장의 파동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이란 결국 모두 같은 맥락이다 예민한 순간들이 멈칫거리며 무뎌지는 일 막다른 곳에 다다른 빗줄기가 수많은 파문波紋을 찍어내듯 슬하엔 들고 나는 발자국들이 많다 네모난 빗방울은 없겠지 동그라미는 하나로 만나는 높은 곳의 한낮 가장 높은 곳의 일들이란 가장 낮은 곳의 파동이 되는 것이다 그런 풍..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 진열은 사열이다 : 김송포

- ⟪내외일보⟫ 2024. 03. 22. |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_해설 진열은 사열이다 정숙자 시인의 서재 김송포 군인의 아내로 사는 일은 사열하는 것이다 사열하는 것은 정돈이다 사열보다 중요한 것은 서열이다 서열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릇은 오래된 것부터 새로운 것까지, 음식은 발효된 장아찌부터 말린 부지깽이와 최근 무친 나물까지, 하물며 책장에 진열된 책은 태어나기 이전의 족보부터 손글씨로 쓴 연모의 구절과 액체계단의 사건과 지독한 쓸쓸함과 아픔이 병사의 도열처럼 흐트러짐 없이 장렬하다 가장 귀한 것 중의 하나는 가나다순으로 이름을 올린 시집이 이중 대열로 한 치의 착오 없이 서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집에 가서 이름을 확인해야 한다 이름이 없다면 유산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작은 문화를 쓰는 것이..

늦더위/ 신덕룡

늦더위 신덕룡 그는 포크레인 기사의 보조였다 긴 장마로 파여나간 방죽에 포크레인이 큰 돌을 쌓은 뒤 벌어진 틈에 작은 돌들을 끼워 넣고 그 위에 철망을 씌우는 일이 그의 몫이다 이 나이까지 십장 한번 해 본 적 없다고 했다 세상은 어차피 불공평한 게 아니냐고, 뭔가에 부딪치고 깨지고 사달이 나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고 애시당초 이렇게 생겨 먹은 거라고 그가 말할 때 잇새로 쉭쉭,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막걸리 서너 잔에 취했냐고 지금까지 불러주는 데 있는 게 어디냐고 두 남매, 그 힘들다는 시집 장가 보낸 게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말이 입속에서 달싹거렸다 하늘 향해 주먹 쥐고 부르르 떤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후회했다고 깔고 앉은 돌이 불판처럼 뜨거워 엉덩이를 옮겨 앉던 그가 정리할 게 남았다며 지는 해..

도깨비 바람, 동백 외 1편/ 김광기

도깨비 바람, 동백 외 1편 김광기 한겨울에 피는 붉은 동백꽃 속에 제주 사람들의 한恨과 삶의 의지가 있다. 4·3의 꽃이기도 한 동백꽃은 제주 사람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목을 뚝뚝 꺾어내며 낙화하는 꽃들, 꽃들이 떨어지는 시기가 되면 모가지가 끊어져 널려있는 꽃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꽃잎 하나하나 날리는 애기동백을 심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동백보다 이상적인 사랑의 애기동백으로 심상을 다스리는 제주 사람들, 아직 동백꽃을 닮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오갔지만 잘 보이지 않았던 섬, 애기동백이 지고 나면 다시 피기 시작하는 동백꽃들처럼 웅크리고 있는 이데아들. 꽃 진 자리에 맺히는 동백 열매처럼 푸르고 단단한 것이 한여름까지 뜨겁게 익어가는 동백나무를 휘돌아 감..

꽃차를 마시다/ 김광기

꽃차를 마시다 김광기 꽃의 절정을 꺾어 말리고 덖고 우려 입이 데일까 싶어 입안이 뜨거울까 싶어 혹시는 꽃의 화기에 몸이 데지는 않을까 싶어 후후 불면서 차를 마신다. 꽃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마시고 있다. 가끔씩 꽃차의 효능에 대해 듣고 있을 때는 채 발화하지 못한 일그러진 꽃의 형상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형상 너머의 것을 보는 듯 더 아름답게 환생한 꽃을 내어놓듯 제 몸을 우려 내어준 꽃에 경배하듯 이렇게 귀한 시간에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 차를 대접하며 당신은 누누이 꽃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당신의 환한 모습이 꽃차보다 그 이전의 꽃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따라주는 대로 얼른 꽃차를 비우지만 당신은 고상하고 품위 있게 차를 마시고 ..

끝/ 김조민

끝 김조민 그는 아침 일찍 거리로 나갔다 좁은 골목을 지나 야트막한 오르막을 천천히 걸었다 따르던 어둠이 점점 멀어졌다 붉은 대문 집 마당을 지나갈 때 강아지가 낑낑 대며 자신의 목줄을 잡아당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슬픔과 희망이 막연하게 뒤엉킨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로지 하나의 끝을 바라보았다 오르막은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처음을 둔 채 계속되었다 하수구에서 태어난 날벌레처럼 무한히 자라나 온통을 뒤덮는 한숨처럼 어제의 꼬리가 그의 발목을 낚아챘다 잠시 비틀대기는 했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끝이 잠깐 흔들렸을 뿐 그는 다시 한 발은 내딛는 것으로 삶을 대신했다 더러움과 깨끗함은 현실적이어서 명확했다 처음부터 그가 뒤쫓던 것은 등 뒤에 달라붙은 텅 빈 황무지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절망이기도 했다 그는..

타클라마칸/ 한영수

타클라마칸 한영수 스스로 죽은 짐승은 고기로 먹지 않아요, 양치기의 네 번째 딸은 양을 삶는다 모래구름이 핀다 돌아 나올 수 있을까 가까이 어디에는 아름다움이 부조된 사원이 있다 초승달 눈썹을 비추는 샘도 있어 마르지 않는다는데 생활은 갓길이 없다 걸음마다 부서지며 모래 우는 소리가 난다 한 시간이 십 년같이 서천 서역으로 가는 평생같이 낙타 열네 마리 서로 소중한 말은 둘 말 위의 암탉 열 수탉 하나 개도 세 마리 행렬의 어디쯤에서 나는, 네 번째 딸은 맴을 도나 조용히 흰 터번을 쓰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나 이것은 죽은 양 이것은 죽인 양 선을 긋기도 전에 양은 양을 낳는다 양치기는 양치기를 반복하고 푸른 색 샌들이 갈색으로 흐릿해질 때까지 사구는 살아있는 것처럼 이동하며 모양을 바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