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곶 외 1편
김안
나는 몰래 집에 사는, 어린 딸아이가 바닷가에서 몰래 들고 와 어느 구석에 놓아둔, 그리고 곧장 잊어버린 돌멩이가 되었고, 돌멩이가 둥근 배를 부풀리다 커다란 한숨을 쉬다가,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처럼 냉장고 구석 곰팡이 슨 사과처럼 유행 지난 철학서나 읽으니, 차고 아름다운 말만 고르며 온종일 앉아 있다 보니, 딸아이는 어느새 자라나 책상 옆에 지층처럼 쌓인 문예지 속에서 내 수줍은 얼굴을 찾아낸다.
배고프지 않은 저녁, 나도 모르는 새 책상 위에 놓인 돌멩이들처럼 딸아이와 나란히 앉아서 써본다 천천히 썩고 닳아가는 세갈 같은 이름들, 각지고 투명한 이름들, 녹아 발밑으로 흘러 긴긴 세월의 평행선이 될 이름, 말의 곳에 숨겨진 이름 모를 것들을
-전문(p.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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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eppa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들판에는 머리만 남겨진 비둘기
창문에는 멍든 구름들
오만과 부끄러움
죄의식과 편견
무능과 순수
게으름과 욕망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새로 추가될 약의 이름을 생각한다.
약의 개수만큼 손가락을 접는다.
남겨진 손가락을 귀에 넣고 전진시킨다,
전진,
희망과 삶의 전진.
나는 듣는다,
마지막 우편물에 적힌 주소지에서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 하얀 국수를 삶고 계란을 풀고,
누군가 냉장고 문을 열고,
누군가 둥근 식탁에 앉아 누군가와 마주하고,
천사가 떨어뜨리고 간 횃불처럼 환해지는 뱃속.
나는 나의 귀로 듣는다, 모든 마음이 내 것인 양,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릇,
끊긴 기타 줄처럼 뒤엉킨 국수,
깨진 거울,
선생님, 무엇 하나 지탱할 수 없는 검고 가느다란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게 한때 제 직업이었습니다만······
듣는다,
변명을 시작하기 위한 음소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약물의 이름을.
- 전문(p.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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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Mazeppa』에서/ 2024. 2. 23. <문학과지성사> 펴냄
* 김안/ 1977년 서울 출생, 2004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오빠생각』『미제레레』『아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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