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
박찬일
농구공 위를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지만
늘 그 자리다. 원주 위다.
2차원 시공간을 빠져나갈 재간이 없다.
원주는 동일하게 무한히 반복되나 어느 지점에 있건 농구공 표면이다.
2차원 시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농구공 표면이 우리집이라.
몰락은 3차원에서 왔다. 농구공 바람이 빠질 때
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로 끝나는 시詩가 무슨 상관인가?
농구공 반지름이 제로가 된 날,
농구공이 사라졌다. 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
-전문(『시와반시』, 2014-봄호)
▶세계는 왜 존재하(지 않)는가??(발췌)_박찬일/ 시인
'왜 차라리 무가 아닌가?' 라이프니츠의 질문이었다; 양자역학의 여러 빅퀘스천을 다룬 책 제목은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였다.
(······)
멸종은 늘 진행 중이다; '인류중심주의'를 말할 수 있다. 인류를 위해 우주는 탄생했다고.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견해, 수많은 우주적 관점주의 중 한 가지 관점에 불과하다. 많은 관점주의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1)
1)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주체에 의한 인식을 강조했으나, 즉 '인식을 위해 대상이 있는 것이지, 대상을 위해 인식이 있지 않다'("우리 모든 인식이 대상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가정이다. [···] (이제)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 B X VI)고 했을 때, 이것은 대상의 존재 '조건'을 (인간의) 인식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우주론에 적용하면, 객석 없는 우주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칸트의 인식론은 '인류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정당화시켰다.
[관찰하는 인류라는 객석이 없으면 우주라는 무대가 없고, 관찰당하는 우주 무대가 없으면 우주 자체가 없는 것, 인류중심주의이다.]
하이데거가 진리를 '은폐되지 않은 것 aletheia'이라고 하고, 나아가 그 탈脫은폐시키는 역役이 인간에게만 주어졌다고 하고, 그리고 인간의 능동적 행위를 요구할 때 이 또한 인류중심주의에 접근한다. 하이데거는 '지성과 사물의 합치'가 함의하는 '수동성'을 넘어서는 것을 인간의 '일'이라고 보았다. '존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존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우주의 가장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왜 할 수 없겠는가? 사르트르가 즉자적 존재가 아닌 대자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른 존재자들과 차별화시켰을 때 이 또한 인류중심주의적 우주론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칸트는 그러나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변증론'에서 우주이념의 증명 불가능성을 얘기한다. 즉 주체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한다. 신神이념-자아이념[영혼이념]과 마찬가지로 '우주이념' 또한 증명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칸트가 그의 선험적 인식구조론에서 물자체는 알 수 없고 현상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공간-시간-인과율이라는 선험적 형식, 즉 선험적 직관형식 및 선험적 범주형식이 칸트 인식(론)의 조건이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이미 현존재로서 세계-내-존재 Das in der Welt sein des Daseins'이다. 본질을 묻기보다 실존을 문제 삼아야 하는 존재자이다. 인간이 이미 세계에 편입된 존재라는 것, 즉 '이미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 Dasein'인 점을 강조했을 때, 이는 '왜 차라리 무가 아니고 어떤 것이 있는가?' 물은 라이프니츠를 우습게 만든 것이고, 세계[우주]이념-자아이념을 증명의 대상으로 삼은 칸트를 우습게 만든 것이다.
칸트가 물자체의 인식 불가능성을 말할 때, 공간-시간-인과율 등 선험적 형식을 말할 때, 그리고 초월적 이념들로서 신神이념-우주이념-영혼이념의 증명 불가능성을 말했을 때 이것은 역설적으로 칸트의 근원에 대한 인식 욕구를 반영한 것. '근원'의 다른 말이 '최종이론 final thory'이다. 최종이론은 존재하는가?는 세계는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최종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같은 대답이다. '칸트에 의해(『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변증론'에서) 우주이념이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었을 때, 칸트는 '이미[처음에는]' 세계론자-우주론자가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연과학적 이념에 투철했다 해도 우주이념을 증명불가능으로서 부정했다면 말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말미의 '초월적 방법론'에서 우주이념과 함께 증명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내렸던 신神이념을 다시 불러들였다.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도덕준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신은 두말할 것 없이 세계[우주] 그 자체이다. 우주[세계]를 만드신 분이다. (칸트에게) '세계는 존재했다.'
(······)
인간의 작품 올림포스산이 아닌, 신神의 작품 '에덴동산'에서는, 유일신적 세계에서는, (신이 만든) 세계가 남김없이 파악되고, 그리고 정당화된다.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가 아니고, '세계는 존재한다'이다. (p.시 176/ 론176 // 179 //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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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결』 2024-봄(창간)호 <철학과 사유의 골목>에서
* 박찬일/ 시집『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나비를 보는 고통』외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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