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 유리의 존재 : 김행숙

검지 정숙자 2024. 4. 7. 14:17

 

    유리의 존재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전문(『제16회 미당문학상 수상 작품집』, 2016)

 

  제2부 불화의 공동체_대화의 발명/ 2. 유리의 포옹(발췌)_박동억/ 문학평론가   

  이 작품은 단 한 문장의 열망으로 집약될 수 있다. '나'는 '너'에게 가닿고 싶다. '너'를 끌어안고 싶다. 우리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상대에게 닿으려는 강렬한 열망을 여기서 확인한다. 결국 포옹의 자세에는 타자와 관계하는 일이 자아를 무너뜨리는 사건이 될지라도 감히 그것을 용인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볼 수 있어도 만질 수 없다면, 그 관계는 죽음이다. 포옹하는 동시에 산산조각나는 것이 존재라면, '나'는 깨져도 좋다. 오히려 "제발 나에게 돌을 던져줘"라는 간청처럼 이 작품에는 타자와 마주하기 위해서 상처 입을지라도 '너'를 끌어 안으려는 에로스적 열망이 우선한다.

  김행숙 시인의 '나'는 끊임없이 휘청거린다. 그 의의를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발견하면, 그것은 시인이 자아를 바로 세우기 위해 타자와 세상을 수단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도리어 그는 자아를 타자를 받아들이는 열린 장소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그 열림이 자아상실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시인은 「유리의 존재」 안에 그 모순을 명시하고 있다. 예컨대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라는 인용구의 마지막 부분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러나'라는 접속부사의 활용이다. 당신이 창밖에 서 있다면, 나 또한 그곳에 선다. 그런데 왜 시인은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로 두 문장을 묶는 것일까. 이 문장을 "당신이 창밖에 서 있다면, 그러나 나 또한 그곳에 선다.' 라고 바꾸어 읽는다면 이 모순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어쩌면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를 통해 시인은 끝내 두 존재가 나란히 서는 순간에도 그들이 서로 어긋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나'라는 접속부사의 인간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떤 상실이나 고통, 그리고 어긋남을 인정한 때만 비로소 당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바를 암시하는 셈이다. (p. 시 142/ 론 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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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억 평론집 『침묵과 쟁론』에서/ 2024. 2. 8. <푸른사상사> 펴냄  

  *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주요 평론「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 200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정확한 리얼리즘 :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저서『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공저『오규원 시의 아이러니 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