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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를 읽으면 투명한 느낌이 나"(두 마디)/ 이우성 : 고명재

"네 시를 읽으면 투명한 느낌이 나"(두 마디) - interviewer: 고명재(시인) - interviewee: 이우성(시인) ■ 고명재: 이번 시집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2022. 문학과지성사)은 참 투명함이 돋보였어요. 꾸미거나 드러내거나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골똘히 바라보면서 충실하게 담아내려는 어떤 태도 같은 게 느껴졌어요. 치장하거나 둘러 말하지 않는 이 태도나 힘은 어디서 온 건가요. (p. 169) □ 이우성: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뵈러 간 날이 있어요. 치매를 되게 오래 앓으셨어요. 기억하시는 건 매일 다니는 집 앞의 산책로 하나 정도. 그런데 그날은 저를 보고, 어, 왔니, 하고 담담하게 말씀하셨어요. 신기한 날이었어요. 할머니 손을 잡고 걷는데 꽃이 피어 있었어요..

대담 2024.04.02

황사랑_어둠을 통과하는 시(발췌)/ 반복적인 밤의 무늬 : 문은성

반복적인 밤의 무늬 문은성 얼마나 큰 괴로움으로 죽은 자를 기억하는가 두 손을 간절히 쥔 채 땅속에 고개 파묻고 가장 두려운 기도를 올리게 될까 눈물을 씻고 세수를 하고 늦은 저녁을 먹은 후 가장 낮고 괴로운 잠자리에 누워서조차 살고 싶다는 역설적인 욕망을 개발했을까 아침에는 그 욕망에 대한 크고 무한한 좌절과 반복적인 호흡곤란의 공포 섞인 눈물을 개발했을까, 얼마나 얼마나 죽기 싫으면 도리어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 충동을 개발하고 자기 온몸을 부드럽고 물컹한 죽음의 피부 속에 푹, 찔러 넣는 긴 칼로 만들었을까 밥을 먹고 약을 삼키고 사랑을 나누며 점점 삶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그 깊은 죽음의 살점 속에 자기 온몸을 푹 푹 찔러 넣으며 그 속으로 깊이, 더 깊이 하강하게 될까 마구 내려앉게 될까 솟아오르..

사랑이란/ 아델라이드-지예트 뒤프레느 : 정과리 옮김

사랑이란 연가 아델라이드-지예트 뒤프레느와(Adelaide-Gillette Dufrennoy 1765-1825, 60) : 정과리 譯 매일매일을 바람으로 지내는 것, 뭘 욕망하는지 뚜렷이 알지도 못한 채로. 동시에 웃고 우는 것, 왜 우는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언제든지 떼쓸 수 있다는 걸 아침에는 두려워하고 저녁에는 소망하는 것. 그이가 환심을 구할 때는 무서워하고 그이가 윽박지를 때는 저게 연심이려니 하는 것. 제 고민을 보듬으면서도 지겨워하는 것. 온갖 얽매인 것들을 공포에 질리면서도 즐거워하는 것. 심각한 문제들을 가볍게 제끼면서 사소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위장했다가 솔직했다가 하는 것. 소심하고, 거만하고, 멍청하고, 빈정대고. 모든 걸 다 바치면서도 아직도 바칠 게 남았는지 떨면..

외국시 2024.04.01

노대원_어린-어른, 혹은 성숙한···(발췌)/ 시의 신이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쓴 시 : 이우성▼

시의 신이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쓴 시▼ 이우성 너는 이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써서도 안 될 것이며 쓴다고 하더라도 그럴듯한 문장은 결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시의 신이 말했다 꿈에서 나는 울었다 시인이니까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나는 너를 떠날 것이다 그 순간 화가 났다 그동안 내 옆에 있었는데 시가 이 모양이었어? 가라,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있으나 마나 시의 신 잠에서 깼다 아치피 시 써서 성공하기는 글렀어 혼잣말하며 부러운 시인들 몇 명을 떠올렸다 시를 쓰려고 소파에 앉았는데 정말 아무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런 시마저 이제 무리인가 어이가 없네 일어나서 청소를 했다 삶을 지우려고 괜히 막 말했어 그래도 신인데 나는 성공한 시를 쓴 적이 없다 눈물이 났다 시를 사랑하기 때문에 ..

수메르 외 1편/ 김건희

수메르 외 1편 김건희 앞섶 단 추 하나 뚝 떨어져 신전 계단 아래로 굴러간다 그의 과거를 알고 싶거든 점토판 쐐기 문자를 조금씩 더듬어 봐 한곳에 머물기를 거부한 단추, 이해하는 순간 진흙에 꽂힌 문자는 표창이 되어 네 가슴에 꽂히게 될지도 몰라 신전에 갖다 바친 양 일곱 마리 움푹해진 눈동자로 뛰어나올지도 몰라 진흙 바닥을 막대기로 긁다 죽은 술사가 네 머리에 독약을 뿌리더라도 벌떡 일어나지 마 기도의 방으로 들어가 함부로 신들을 불러내지는 마 캄캄해지는 눈앞의 순간이 성벽처럼 가로막을 떄 당당히 일어나 휘파람을 불어 봐 -전문(p. 32-33) ------------------------ 상수리 경전 저무는 숲에 갔다가 탁! 탁! 도토리에게 얻어맞았다 나를 치고 동화사 돌계단을 굴러 내려간다 놀라 ..

오렌지 지구본/ 김건희

오렌지 지구본 김건희 남극과 북극을 빙빙 돌린다 자유로운 영혼일수록 침이 고이고 껍질은 오래전부터 탈출을 꿈꾸었을 것 귀퉁이 쪼그라든 오렌지 살빛 다른 이들에게 한 쪽씩 나누어졌을 것 꽃을 꺾은 자에게 손을 모은 바라나시*가 전설보다 더 오래 산다 해도 어찌 오렌지 역사만큼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끝이 보이지 않던 갈림길에서 달려 나온 바퀴는 바빌론에서 풀려나온 눈빛이다 눈 감고 입을 열어 과즙 한 입 삼키면 쓴맛 단맛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껍질 잃은 알맹이가 초라하다지만 어느 낯선 접시별에 툭 던져진다면 오렌지 아닌 다른 이름이어도 좋다 내일은 어디에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전문- * 인도 북부의 도시 해설> 한 문장: 사회적인 인식을 가진 시인은 오렌지라는 작고 단순한 사물에서 큰 의미를 끄집어낸..

강현국_ 떠도는 자의 고독/ 폐차장 : 이하석

폐차장 이하석 폐차장의 여기저기 풀죽은 쇠들 녹슬어 있고, 마른 풀들 그것들 묻을 듯이 덮여 있다. 몇 그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을 할퀴다 녹슨 쇠에 닿아 부르르 떤다. 눈 비 속 녹물들은 흘러내린다, 돌들과 흙들, 풀들을 물들이면서, 한밤에 부딪히는 쇠들을 무마시키며, 녹물들은 숨기지도 않고 구석진 곳에서 드러나며 번져나간다. 차 속에 몸을 숨기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바지에도 붉게 묻으며, 나사들은 차에서 빠져나와 이리저리 떠돌다가 땅 속으로 기어든다, 희고 섬세한 나무 뿌리에도 깃들며, 나무들은 잔뿌리가 감싸는 나사들을 썩히며 부들부들 떤다. 타이어 조각들과 못들, 유리 부스러기와 페인트 껍질들도 더러 폐차장을 빠져나와 떠돌기도 하고 또는 흙 속으로 숨어든다. 풀들의 뿌리 밑 물기에..

지나가는 사람/ 유희선

지나가는 사람 유희선 제발, 지난밤의 모든 역을 함께 통과한 듯 민낯을 보여주지 않기를 막무가내인 그녀는, 고무줄 같은 궤도를 탱탱하게 늘이고 있다 나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자꾸 발이 빠진다 다크써클이 사라지고 주근깨처럼 박힌 점들이 순식간에 행방을 감춘다. 거울을 바짝 대고 눈썹을 공들여 그린다. 오른쪽 왼쪽 최대한 평행으로 전철은 내달리고 컬링 집게로 속눈썹까지 바짝 말아 올린다 지금쯤 어느 환풍구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솟구쳐 오르고 있겠지 누군가 부푼 치맛자락을 지그시 누르며 지나갈 동안 그녀는 마스카라를 두껍게 칠하고 있다 안국역에서 광화문역 사이에서는 루주를, 드디어 그녀의 아침은 붉게 밝아오고 나는, 나의 민낯과 누드가 아름다웠던 때를 아득히 떠올린다 야금야금 허리둘레가 늘어나는 순환 전철 안에..

킨츠기 교실/ 서윤후

킨츠기 교실 서윤후 선생은 시즈오카현 출생 녹차의 고장에서 태어났기에 언덕에 대한 이해가 깊다 각자 가져온 접시는 모두 깨진 것이다 조각을 이어 물결 무늬로 만들 수 있겠군요 깨진 곳 사이사이가 다시 친해지도록 작은 홈을 이어 반짝임을 그려낼 수 있을 거예요 금이 간 것을 숨길 수 없으니 더 빛나도록 그렇게 접시의 깨짐을 붙여 메우는 것이 킨츠기예요 상처를 아름답게 발음할 수 있었다 핀잔도 핏기도 없이 녹차를 호호 불며 마시던 선생은 각자 깨진 것과 그것을 메우는 시간을 차분히 기다려 준다 언덕을 가르는 기다림을 해본 적 있나요? 선생은 어느 날 가와구지코 호수가 그려진 엽서에 그런 질문을 적어준 적이 있었다 한국말은 어눌하고 학생들 솜씨는 서툴렀으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매달린 시간이 길었다 이어 붙인 대..

가난했던 어린 날 외 1편/ 서상만

가난했던 어린 날 외 1편 서상만 학급비 납기를 세 번이나 미룬 날, 나는 밤새도록 그 고민에 잠을 못 이뤘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학급비를 갖고 학교에 가야 한다, 선생님과의 삼세 번째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는 우울과 공포 때문에 아침밥도 거른 내 독특한 표정이 곧바로 어머니한테 전달되었다 그런 나의 성화에도 '오늘은 안 된다, 집안에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다 아이가 만아 내가 오늘 꼭 준비해 볼 테니 오늘은 마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내일은 꼭 가져오겠다고 말씀드려라'고 무척 단호하셨지만 나는 같은 말을 너무 자주 들은 어머니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드디어 나의 새로운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실,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읍소작전이다 울음의 음률은 고음도 아니고 저음도 아닌 제법 부드럽기도 한 평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