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Homo evolutis
김추인
자코메티의 남자,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보폭
무릎 끓을 수 없는 긴 다리,
허허 빈 천공을 뚫어낼 듯
육십 년을 내내 걷고 있다
숱한 문짝들을 지나
암흑물질과 광자들 지나 양자의 물결 속을 걸어가고 있다
소립자들의 문은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고 아직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
지평선 저 너머를
별들의 저 너머를 응시하며 걷고 걷는다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쉿! 비밀 하나, 남자의 닉네임은 '보이저'라고도 하는데)
새 천년의 무탄트, 암호를 풀다 기사 한 토막 없었지만
화성, 목성을 지나 토성을, 해왕성의 고리를 곁 보고 지나고 지나고 지나 태양계 바깥, 오르트 구름 속을 걷고 걷도록
별 하나 지날 때마다 '알로호모라'* Mars, Jupiter··· 암호를 불러내며 열고 열고 또 열어
새들이 뼛속을 긁어냈듯
껴입은 시간의 무게를 살들을
비워내고 덜어낸
살가죽과 뼈만의 남자,
녹 청동 옷은 입었던가 벗었던가 기억 없이
되돌아 아득히 창백한 푸른 점,
먼지의 지구별을 일벌하며 걷고 걸으며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그리 계속 걸어 나가야 한다**
-전문-
* 해리포터, 문 열기 암호
** 자코메티의 암호
해설> 한 문장: 이번 김추인의 시집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는 인간 학명에 관한 재해석 또는 새로운 의미로서의 반향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동안 인류가 인간 규정을 하면서 제거한 인간 원형을 복구하면서 근원적 담론을 탐색하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기존의 인간 의미를 우회하면서 현존하는 인간 체계의 문제를 벗겨내고 있다. 선행적으로 기표화 된 인간 개념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수많은 소타자들인 인간 학명을 통해 제기한다. 이것은 학명이 가진 충동적 만족을 넘어서 인간 담론 그 자체의 원형과 의미를 탑재하기를 바라는 대타자의 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시편에서 대타자의 계시는 인간 학명에 대한 불확실성을 예언하고 근원적 주체가 기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함께하는 실존적 존재라는 점을 발견하게 한다. 이처럼 모든 인간을 포함한 실존적 존재들은 신성한 세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성의 영역'에 속해 있다. 이 신성의 영역은 외부 또는 초월적인 것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미래 인간 운명을 개척하고자 한다.
김추인 시인은 이를 긍정하는 가운데 존재마다 가진 기표를 고유한 의미로 지지하면서 개별적인 주체가 주체로서의 지위를 공동으로 확보하게 만든다. 그것은 학명으로 소외되거나 상실된 '인간 기의'에 대해 재해석을 통한 '시니피앙의 몽타주'이면서 '인간 원형'의 고찰이 된다. 그녀 모든 시편을 통과하여 도래될 '신인류의 화법'이 이 시집에서 첫선을 보인다. (p. 시 60-61/ 론 112-113) <권성훈/ 문학평론가 · 경기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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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에서/ 2024. 4. 9. <서정시학> 펴냄
* 김추인/ 경남 함양 출생, 198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모든 하루는 낯설다』『프렌치키스의 암호』『전갈의 땅』『행성의 아이들』『오브제를 사랑한』『해일』등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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