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 선정과 후왕의 즉위(부분)
강기옥/ 본지 편집주간
왕의 죽음과 양위
임금이 죽음을 앞두고 숨을 고르면 임종臨終을 위해 세자와 대신이 자리를 지킨다. 임금이 숨을 거두기 전에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유언을 남기면 동석한 대신은 유교遺敎를 작성하여 정상적인 왕위의 계승을 공증하듯 기록한다. 왕이 승하하면 일단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눕히고 코밑과 입 사이의 오목한 인중人中 부위에 햇솜을 올려놓고 죽음을 확인한다. 즉 햇솜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알고 곡哭을 시작한다. 곡이 나면 내시는 왕이 평소 즐겨 입던 옷을 가지고 궁궐 지붕의 동쪽으로 돌라가 용마루의 중앙에서 왼손으로는 옷깃을, 오른손으로 옷의 허리 부분을 잡고 북쪽을 향해 '상위복上位復'을 세 번 외친 후 서쪽 지붕으로 내려온다. 동쪽은 생명의 탄생, 서쪽은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한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상징하는 행보다.
지붕에서 던진 옷은 마당에서 다른 내시가 함으로 받아 임금의 시신을 덮는다. 상上은 임금, 위位는 임금의 자리이니 임금의 육신을 떠난 영혼에게 다시 육신으로 돌아와 임금의 지위를 지키라는 애절한 명령이다. 그러고는 5일을 기다린다. 행여 5일 동안 영혼이 되돌아와 소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다. 그렇게 소생을 기다리며 3일째 되는 날에는 소렴小殮을 하고, 5일째 되는 날에는 대렴大殮을 한다. 소렴 때에는 옷을 19벌 입히고 대렴 때에는 90벌을 입혀 대행왕大行王이 입관할 때에는 모두 109벌의 옷을 입는다. 이렇게 소렴과 대렴을 거치는 5일 동안에는 임금이 죽어 자리가 빈 상태이기 때문에 정치행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옷을 입혔을까?
조선왕실의 장례는 국장國葬과 예장禮葬으로 구분하여 집례했다. 임금이나 중전, 세자가 죽으면 국장國葬으로 격을 높여 집행했고, 세자빈 왕비의 부모 빈, 귀인, 왕자, 공주, 종친의 2품 이상, 공신, 문무관의 종1품 이상이 죽으면 예장禮葬으로 집행했다. 누가 죽었느냐에 따라 규모와 예우를 달리 집행한 것이다.
왕이 죽으면 당일에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등 삼도감을 설치했다. 국장도감에서는 장례에 따르는 모든 의전과 문한文翰, 그리고 재정 등의 업무를 총괄하고, 빈전도감에서는 시신의 수습과 빈소 마련, 염습과 상복 만드는 일을 담당한다. 산릉도감에서는 장지를 정하여 묘지를 조성하는 일을 담당했다. 묘지에 임금의 시신을 묻기까지는 대부분 오륙천 명의 인부가 5개월에 걸쳐 일을 해야 했다. 왕릉의 구조물로서 석물石物을 조각하여 산릉을 장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간 동안 빈전에 안치한 시신이 썩어 물이 흐르고 악취가 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름에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석빙고에 저장해 둔 얼음을 꺼내어 빙상을 만들고 그 위에 평상을 깔아 온도를 낮추어 부패를 방지한 후 숯과 미역 등을 이용하여 습기를 제거한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 그렇게 많은 옷을 입히지 않았나 싶다.
임금이 돌아가신 후 6일째에 이르면 세자는 드디어 성복成服을 한다. 성복은 성복을 입는 의전의 과정으로써 상복을 통해 대외적으로 상주喪主임을 공표하고 왕실의 후계자임을 밝히는 행위다. 그러나 아직 왕위가 비어있어 국정의 공백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왕이 죽어 슬픈 상황인데도 상주로서의 세자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 엄숙한 의식을 국상國喪의 한 과정 속에서 진행한 것이다. 즉위식은 상복을 입은 세자가 잠시 길례복인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고 선왕의 유언인 유교遺敎와 대보大寶:국새를 받들고 어좌에 오른다. 이후 '동궁'의 명칭은 '전하殿下'로 바뀌어 신하들의 산호(山呼 나라의 큰 의식에 황제나 임금의 축수를 표하기 위하여 신하들이 두 손을 치켜들고 만세, 또는 천세를 외치는 일)로 하례를 올린다. 부왕의 상중이라 정신은 없지만 왕위에 오른 기쁨을 민초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죄수들을 방면하는 사유赦宥령을 내린다. 그러고는 다시 어좌에서 내려와 상복으로 갈아입고 빈전으로 가서 상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역사 드라마에 나오는 즉위식에서 삼현육각을 울리며 성대하게 즉위식을 행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선왕의 시신이 아직 빈전에 있는데 어찌 자식이 즉위식을 올릴 수 있을 것인가. 상중에 즉위식을 올리는 자체를 송구하게 여겨 세자는 왕위 계승을 거절하며 슬픔의 예를 갖추는 것이 즉위식의 모습이었다. 다만 세종대왕은 태종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양위했기 때문에 성대한 즉위식을 올렸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인조의 즉위식도 잔치 분위기였다는 점이 다르다.
조선 초에는 주자가례를 따라 경국대전을 펴 그 예를 따랐으나 세종대왕이 1419년에 큰아버지 정종, 1420년에 어머니 원경왕후, 1422년에 아버지 태종, 1428년에 중전 소헌왕후 심씨의 국상을 치르면서 국가 의식에 대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를 기반으로 1474년(성종5년)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완성했는데 이에 따르면 국가의 모든 행사는 길례吉禮, 가례家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래凶禮의 규범을 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했다. (p. 172-175)
* 블로그 註: 위 글의 전문은 170~183쪽까지입니다. (前略/後略 부분은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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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온문학』 2022-여름(32)호 <연재/ 왕실문화의 이해>에서
* 강기옥/ 한국문협유적탐사연구위원장, 서초문화대학 문화해설사 지도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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