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면앙정가를 읽다 외 1편/ 조선의

검지 정숙자 2023. 11. 29. 00:54

 

    면앙정가를 읽다 외 1편

 

     조선의

 

 

  떠다니는 소문처럼 말이 앞설 때

  사흘 밤낮 눈이 내렸다

 

  읽고 싶은 문장을 접을 동안

  부재를 확인하려는 듯 눈은 한 뼘씩 더 쌓였다

 

  온통 흰색으로 지나온 길을 덮어

  과거와 현재의 시차를 없애버렸다

 

  한번 뿌리가 흔들린 정사政事는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기웃거린 표정들만 입속의 중얼거림으로 남고

  시간의 갈 길에서 구차한 꼬리말들은

  무른 혀끝으로 갈무리해야 했다

 

  무방비로 노출된 외풍의 방향으로 중심이 기울었다

  말라붙은 눈물을 향기로 치환하듯

  시치미 뚝 떼고 꼬인 마음을 삼키고 말았다

 

  은밀하게 비밀이 통하는 녹슨 자물쇠처럼

  누군가 내 가슴속의 말을 꺼내려 할 때

  다시 사흘 밤낮 눈이 내렸다

     -전문(p. 36-37)

 

  * 면앙정가: 조선 중기 송순이 지은 가사.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그의 향리인 담양 기촌에 멈물러 있을 때 제월봉 아래 면앙정을 짓고 그 주변 산수와 계절에 따른 아름다움을 노래한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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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궁화동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가 바람의 술래처럼 사라진 뒤에도

  뒤돌아본 자리에 무궁화는 피었다

 

  눈병 오르는 꽃이라고

  귀가 가렵도록 듣고 자란 아이들은

  무궁화만은 함부로 꺾지 않았다

 

  어린 꿈이 새들의 날개 위로 파닥거릴 때부터

  한 호흡씩 크게 부르는 소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뼈 있는 별 하나 가슴에 담지 못하던 시절에도

  모두가 잠든 밤 꽃불을 밝혔다

 

  어두운 땅속 밑뿌리들끼리 닫힌 말문을 열듯

  살갑게 살아남은 꽃

 

  혼자서는 다 끌어안지 못해

  가슴 맞댄 그 정신으로 하나 되는 것마다

  다섯 꽃잎 속 둥근 수화手話로 펄럭인다

      -전문(p. 82-83)

 

   * 무궁화동산: 담양군 창편면 담양공로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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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담양, 인향만리 죽향만리』 에서/ 2023. 10. 31. <상상인> 펴냄

  * 조선의/ 201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당신, 반칙이야』『어쩌면 쓸라린 날은 꽃피는 동안이다』『빛을 소환하다』『돌이라는 새』『꽃, 향기의 밀서』『꽃으로 오는 소리』『반대편으로 창문 열기』『아직 도달하지 않은 입의 문장』, 저서 『생명의 시 1~5』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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