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 휘민

검지 정숙자 2023. 12. 3. 01:57

 

    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

 

     휘민

 

 

  장마로 흙탕물에 휩쓸렸던 백합들이

  쓰레기가 뒤엉킨 덤불 속에서

  시든 꽃술을 흔들고 있었다

 

  개는 킁킁거리며 제 목줄을 잡아당기고

  나는 무너진 화단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사이 늙은 개를 태운 유모차가 지나갔다

  플래시를 깜박이며 자전거 몇 대가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진흙을 뒤집어 쓴 꽃의 얼굴로

  슬픔이 내게 물었다

 

  너는 취하지 않고 살 수 있니?

 

  그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군락을 이룬 멸치들이 소나기처럼 몰려왔다

 

  가만히 손을 뻗어 사선으로 기울어지는

  미끄러운 슬픔의 뼈대를 더듬어 보았다

 

  (그사이 백합들은 제 목을 비틀어 마지막 향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내가 오랫동안 응시했던

  빈 페이지의 적요를 넘기려는 듯

  개의 목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어느새 흰빛은 사라지고

  손바닥엔 물비린내만 남았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휘민에게 삶은, 살아 있는 존재들은 "손쓸 수 없는" 무엇이며, 생생한 현재형의 실물로 마주하고 포착할 수 없는 무엇이다. 휘민은 이 '방법 없음'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무능을 자인하는 것이 최선의 삶의 윤리이며 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손바닥에 남은, 살아 있는/ 있던 것들의 '물비린내'만 뒤늦게 확인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삶의 어긋난 시차들 혹은 삶이라는 본질적 어긋남의 사태에 처한 '무능한' 시인에게는 가없이 허락된 향유와 보상이 있다. 이 시의 제목에 명시된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아름다움은 "손쓸 수 없는" 것, '불가능성'과 '무능'의 방식으로 체험되는 것, 상실과 슬픔뿐인 존재가  어쩌면 이렇게 가난한 실존을 살아내는 존재일수록  더 많이 더 깊이 누릴 수 있는 기이한 축복과 같은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떤 것과 '나'와의 불가해한 거리 속에서 발생한다. 고통이 터져 나오는 지점과 구별하기 어려운, 어긋난 거리와 "엇박자의 리듬" 속에서 생성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름다움이 '나'의 자아를 사로잡아 사라지게 하는 반면, 고통은 '나'를 사로잡아 극대화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고통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빨리 서로 몸을 바꾸는지 누군가/무엇인가 사라지는 것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한 자들, 다시 말해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p. 시 13-14/ 론 163-164) (김수이/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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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에서/ 2023. 11. 20. <걷는사람> 펴냄

  * 휘민/ 충북 청원 출생,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등단, 시집『생일 꽃바구니』『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시집『기린을 만났어』, 동화집『할머니는 축구 선수』, 그림책『라 벨라 치따』등, <시힘>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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