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모래/ 송시월

검지 정숙자 2023. 12. 2. 01:52

 

    모래

 

    송시월

 

 

  허스키하고 붉은 나의 음색을 먹겠다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벌나비들

  달달하고 후끈한 귓바퀴에까지 앞다투어 앉는다

 

  한국형 뮤지컬 넌버벌 난타

  비리통 기침통 열꽃통 목쉰 노래통을 난도질한 나는

  온몸이 부서져 사방으로 튀는 축축한 모래알

 

  오버톤교에서 뛰어내린 50마리의 개들이 컹컹거리고

  팽목항에 어린 꽃송이들 떨어지는 소리

 

  뗏목을 끌고 먹물의 바다를 누비는 청년 예수

  나를 막장에서 건져 올려 거울 앞에 세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엉켜 어지럽게 콜록거리는 회전목마

  나도 너도 그도 아닌 내가 위아래 좌우로 빙글빙글 돈다

 

  거울 속 햇살에 활활 타는 분서갱유,

  예수와 붓다가 타고 공자와 노자가 타고 모래의 책과

  모래의 여자가 타고, 아직 덜 씌어진 내가 탄다

 

  모래알로 바스러진 나를 수도 없이 복제해 사구를 만드는 거울

 

  나는 모래를 씹으며

  "시간은 까칠까칠한 모래알이다"로

  창세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을 곤충도감에 올리기 위해 모래사막에 사는 곤충을 찾아 떠났다가 우연히 사구沙丘 안에 갇혀 사는 여인과 함께 살게 되고 결국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는 이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모래사막의 일부가 되어가며 모래 속의 곤충처럼 살아간다. 시인은 이 작품을 배경으로 화자를 "모래의 여자"에 비유한다. "모래의 여자"는 모래에 갇힌 여자이고 여기에서 모래는 이 여자의 주체성을 만드는 무수한 거울들이다. 화자의 재-주체화는 무수한 거울들을 자신에게 비추는 과정이다. 거울들은 화자에게 들어와 화자와 섞이고 화자가 되고 화자와 자리바꿈하면서 화자의 끝없는 재-주체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나도 너도 그도 아닌 내가 위아래 좌우로 빙글빙글 돈다"고 함으로써 재-주체화 과정의 혼란을 이야기한다. 화자에게 동화同化의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같이 동서양의 성자들이다. 이들은 절대적 타자 모델들로서 궁핍의 존재와 대척점에 있다. "모래알로 바스러진 나"는 이 다양한 거울에 의해 분열된 주체(split subject)를 가리킨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포스트 구조주의의 대가들이 하나같이 말한 것처럼 통합된 주체(unified subject)란 과연 가능한가? 들뢰즈, 데리다, 푸코, 라캉 등 현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에 의하면 통합된 주체란 서양 근대 철학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이들에 따르면 이제부터 모든 사유는 통합된 주체의 존재에 대한 거부와 분열된 주체의 필연성에 대한 안정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모든 주체 안엔 이미 다른 주체가 들어와 있다. 알랭 바디유(A. badiou)의 말처럼 "주체란 개인이 아니라 그 개인이 궁극적으로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나타낸다." 주체 안에는 다양한 주체들이 들어와 있으며 주체 변환 혹은 새로운 주체의 생성은 이 복잡한 주체-현장에서 일어난다. (p. 시 112-113/ 론 159-160) (오민석/ 문학평론가 · 단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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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간수의 산통은 진행형이다』 에서/ 2023. 11. 1. <시산맥사> 펴냄

   * 송시월/ 전남 고흥 출생, 1997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12시간의 성장』『B자 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