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구도 외 1편
최휘
우리는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갔어
나는 벤치에 앉아 이 생을 생각하고 있었지
우리 집 개 이름은 인생이야
늘 생을 뛰어다니고 냄새를 맡고
말도 잘 안 듣고 꿈속에서까지 짖어 대고
꼭 사람처럼 인생을 다 안다는 듯 킁킁대고 지랄이야
그래도 한 식구니까 간식을 내밀었지
가족은 나무 그늘에 서서 자꾸 뭐를 흘리면서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삼각형은 안정된 구도라고 배웠어
그런데 저 인생이 와서 꼬리를 흔들며 받아먹어야
너, 나, 인생이라는 삼각구도가 되는데
개놈이 저만치 서서는 내가 먹이를 내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목을 틀어 더 바깥을 보고 있는 거야
저 엉뚱한 시선이 닿지 않아 삼각구도가 약화되고 있어
인생아! 소리쳐 불러도 인생은 자꾸 저 먼 곳만 바라봐
가족은 왜 늘 나무 그늘에 기대어 비웃고 있는 걸까
나는 삼각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믿을 건 인생밖에 없는데
멈추질 않아, 욕이
이 개놈아! 이 인생아!
-전문(p.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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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름
비단뱀이 울창한 여름 나무 아래를
리리리 리리리리 기어간다
피자두가 주렁주렁 열린 자두나무 아래를 기어가며
열흘은 지나야 먹을 수 있대
라고 한다
자둣빛 구름 사이로 멀어진 마음이
두 줄의 비행운으로 지나간다
참 속상했겠다
지나간 날들을 쓱쓱 핥아 주는 바람 같은 말
청포도 참외 토마토 오이 감자 옥수수
함께했던 여름들이 지천이다
여름의 가장자리를 밟으며 뙤약볕 아래를 누비며
아 더워, 라고 말하면
들은 듯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이제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차라리 나를 사랑해 버렸어
난, 여름
이렇게 말할 거다
-전문(p.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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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난, 여름』 에서/ 2023. 10. 23. <시인의일요일> 펴냄
* 최휘/ 경기 이천 장호원 출생, 2012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 동시집『여름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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