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사슬을 위한 랩소디
고명자
재송 기슭의 나는 우리 동네 가장 질긴 뿌리다
그래, 먹어 치워 봐라 나를
식물들도 오월이면 몸싸움을 한다
은근슬쩍 얼키설키 초록이 질펀해지면
귀 어두운 새도 말문이 터진다
넝쿨 식물이 유리창을 뚫겠다
한겨울 눈 속에도 꼿꼿하던 나무들
넝쿨에 휘감겨 시들어 간다
누군가 집을 허물고 떠난 빈터에
산이 어적어적 내려왔다
푸른빛 긴 혀를 뽑아 허공을 쑥 핥아대니
고양이 풀씨 칡넝쿨 벌레 딱새 온갖 것이 튀어나온다
눈 밖에 난 요괴처럼 날고 기고 먹고 먹히고
눈물 콧물 재채기 오월의 아수라다
마당에 산맥이 들어섰다
읽던 장자를 "탁" 덮었는데 꽃가루 분분하다
집 꼴이나 사람 꼴이나 그렇고 그래서
톱을 들었다
등꽃 대궐 수십 채 썰어댄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위의 시는 자연을 "먹이사슬"의 그물망으로 파악하는 시인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그물망 안에는 시적 자아 역시 그것의 한 분자로 위치하고 있다. 일단 이 시는 도입부에서 "나는 우리 동네 가장 질긴 뿌리다"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시적 상황을 보면 지금 시적 자아는 『장자』를 읽으며 그 경전 속에서의 가르침처럼 마음을 다스리면서 짐짓 소요유逍遙遊의 자세를 가다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월이 되어 만개하는 자연의 "몸싸움"은 꽃가루처럼 난분분하고 역동적이다. 이 계절에는 "초록이 질펀"해지고 "새도 말문이 터진다". "고양이 풀씨 칡넝쿨 벌레 딱새"를 포함한 "온갖 것이 튀어나온다"고 시인이 표현하듯,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생기生氣의 분출이 팽팽한 활력으로 충만해지는 오월이다. 이것이 시적 자아에게는 생명들의 "아수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생해, 『장자』를 읽어 내려갔던 목표였을 유장한 소요유의 관조를 불가능케 만든다는 것이 시적 자아의 태도다.
이 생명의 분주함,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아수라"를 최종적으로 제압하는 것은 시적 자아가 들고 있는 "톱"이다. "톱을 들었다/ 등꽃 대궐 수십 채 썰어댄다"는 표현은, 그러나 자연에 대한 지배나 충동적 거세의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거꾸로 상호의존적이면서도 생명의 순환을 위해 불가피할 것이 분명한 먹이사슬 안에, 시적 화자 역시 상황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p. 시 16-17/ 론 131-132)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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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나무 되기 연습』 에서/ 2023. 12. 5. <걷는사람> 펴냄
* 고명자/ 2005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술병들의 묘지』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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