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정현_한 연금술사의 벤야민적 써나감(발췌)/ 처음으로 : 황강록

검지 정숙자 2023. 12. 13. 14:55

 

    처음으로

 

    황강록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이런 어색한 일은 될수록 피해 왔다

 

  아버지가 밥을 차려주었고

  나는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 같은 건 

 

  될수록 피하고 싶은 어색한 일

  이었다. 가급적이면 떠들썩하고, 정신없이 바쁘고··· 그렇게 어떨결에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일

 

  아버지는 늙은

  얼굴만 빼고는 몸이 모두

  낡은 기계로 되어 있었다. 삐걱거리고 균형

  을 잘 잡지 못했다. 무척

  오랫동안 그 불편한 기계로

  험한

  일들은 해왔었나 보다. 당연히

  아버지 혼자서 밥을 찬찬히, 맛있게 차려 본 적이 없기도 할 테고······

 

  아버지가 차린 맛없는 밥을 우린

  말없이 먹었다. 원래

  아버지와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오죽하면

 

  이번이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된 후, 한참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출연한 꿈일까 말이다. 매우 드문

 

  그 순간을 아버지와 난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알 수 있었다.

 

  난 쑥스럽지만

  기계 몸으로 삐걱대며 일어서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부축했고

  쑥스럽지만 

  좀 더 자주 아버지와 이렇게 단둘이 천천히 밥이라도 만들어 먹을 걸 그랬다고

  말했고 쑥스럽

  지만······

 

  꿈이 끝나기 직전에 입을 겨우 열어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난 아버지가 수줍어하고 있고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깨어나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전문-

 

  ▶ 한 연금술사의 벤야민적 써나감/ 2. 관료적 기계-아버지에 관한 어떤 표정(발췌)_ 김정현/ 문학평론가

  이처럼 「처음처럼」에서 읽어낼 수 있는 '씌여지지 않은 것'은 관료적 아버지와 꿈속의 아버지가 어떻게 겹쳐지고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의 층위를 주목할 때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왜 이 시 속의 아버지는 "얼굴만 빼고는 몸이 모두/ 낡은 기계로 되어 있"으며, "삐걱거리고 균형/ 을 잘 잡지 못"하는가. 현실이란 상징계적 시스템이자 낡은 관료의 더러운 제복(카프카)처럼, 이 시 속의 아버지는 '낡은 기계'의 육체를 지닌 존재라는 것. 해당 측면에서 이 '기계-아버지'의 존재는 낡고 부패한 관료적 세계와 아들의 얼굴을 진정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진정성이 묘하게 겹쳐 있는 형상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시인이 "구식의 기계로서는 밥을 맛있게 차릴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아버지와 난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알 수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 시 속에는 관료적 세계의 '형벌'이 이미 '기계처럼' 아버지의 육체를 점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얼굴'을 지닌 아버지가 마치 잉여처럼 존재하고 있다. 즉 목적과 이유도 없이 아들을 사랑하며, 아들의 사랑한다는 말에 '수줍어하고 기뻐하는' 표정을 지닌 인간적인 아버지를 원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아버지가 단지 꿈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진실.

  바로 이 기묘한 꿈의 풍경이 시인이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근본적 이유가 된다. 요컨대 이 기계-아버지의 낡은 육체도, 그리고 수줍어하는 표정도 모두 시인의 근본적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시인은 보려 한다. 눈물이란 렌즈를 통한 '알 수 없는 어둠을' 그리고 그 곳에서 존재해야만 하는 무언가를.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분명히 인식하기 위해서 반드시 경유해야 할 이 세계의 무의미함을. 시인은 우리게게 묻는다. 왜 이 동질적 세계는 무가치하며 파괴되어야 하는가를. (p. 시 150-152/ 론 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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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3-9월(405)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시/ 작품론> 에서

  * 황강록/ 2000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지옥에서 뛰어놀다』『벤야민 스쿨』 

  * 김정현/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공저『한국 근대시의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