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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지나간다 외 1편/ 이재연

아이들이 지나간다 외 1편 이재연 이제 어디에도 지난날은 없다 순식간에 여름이 사라지고 포도알에서 술맛이 난다 술맛을 알고 생활을 이기려고 했지만 나를 이기려고 했지만 결국 잃는 것은 나였지만 입술 끝에 허망한 것들이 매달려 있다 마른 잎사귀를 털던 바람도 햇빛도 한번은 죽어라 바라보고 싶은 감정으로 아직 영원을 발명 중이다 정말이지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신을 죽이는 것보다 신을 꿈꾸는 것이 낫다 목줄을 길게 풀어놓은 아이들이 지나간다 느닷없이 입에서 신맛이 난다 눈을 감고 신맛을 삼키면 어른이 되어 있다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세상을 조금 앓은 나이 어린아이는 짐을 싼다 멀리 강원도로 갈 것이라고 이 추운 겨울 저녁 허투루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아이는 짐을 싼다 이제..

단순한 미래/ 이재연

단순한 미래 이재연 누가 합해지거나 나누어지거나 사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해하려고 하던 노력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있다면 아보카도 씨앗에 물을 끈질기에 갈아 줍니다 안에서도 밖이 환히 보여 자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무 밑에 의자가 버려져 있습니다 의자 옆에 창문도 버려져 있습니다 간혹 버려지는 노년도 있어 좀 더 많이 걷고 있습니다 많이 웃어 주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미래처럼 다가왔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있다면 아보카도 씨앗에 주는 물을 끈질기게 갈아 주고 있습니다 나무를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두고 보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밖에 무엇을 두고 보자는 심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물로 끝을 보자..

복서(Boxer) 외 1편/ 이희주

Boxer 외 1편 이희주 복서를 꿈꾼 적 있었지 다른 아이들 주로 트레이닝복 등판에 KOREA를 붙이고 다닐 때 나는 BOXING을 붙이고 다녔지 두들겨 패려면 그만큼 두들겨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챔피언은 항상 쓰러져도 다시 일어섰으므로 피를 흘려도 마지막엔 언제나 웃었으므로 너무 멋져 꾸었던 꿈 그게 진정 나의 꿈이 아니었을까? 그래, 복서의 길을 걸었어야 했어 세상과 맞닥뜨려 깨고 부수고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고 일어나 또 덤벼야 했어 인생을 섣부르게 안 탓에 너무 빨리 꿈을 버렸어 순한 양이 되어 너무 일찍 세상에 잡아먹혔어 그런데도 아직 나는 없지 않고 있어 주먹 없이 우두커니 -전문(p. 31) ---------------------------------- 내가 너에게 있는 이유 너..

돌아오는 길/ 이희주

돌아오는 길 이희주 동해에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우동을 먹는다. 머리 하얀 사람 홀로 즐기는 늦은 아침. 이 먹먹한 쾌감은 무엇일까. 어제 주문진은 밤새 등댓불에 파도들이 잠을 설쳤고 나는 퇴직 후의 계획을 묻는 친구에게 그냥 고요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성의 없는 대답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다독여 우동을 먹다가 문득 직장에서의 마지막 퇴근길, 진정 이 길이야말로 이제서야 나를 내게로 돌아오게 하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던 그날을 생각한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지. 따지고 보면 직장생활도 머나먼 여행이었어. 동해에서 돌아오는 길, 홀로 점심을 먹으며 나에게 나의 길을 묻는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 버렸던 꿈을 되찾는 길, 온전히 나를 고요하게 만드는 길에 대하..

파묘 외 1편/ 김이녘

파묘 외 1편 김이녘 안에서 바람이 불어 나온다. 그림자들이 흔들렸다 몸 밖의 것들이 핼쓱해졌다 장도리들을 꺼내는 소리들이 분주하였다, 방문이 쪼개진다 사람들이 얼룩지며 소란해졌다 의자에 걸쳐둔 종아리가 덜렁거린다 지붕을 굴렀다. 잠을 설쳤다. 진드기가 속눈썹을 타고 있다. 상수리 깍지가 바스러지는 소리. 숲을 헤집었다. 무릎께에서 자빠지는 비석. 숲 개미들이 산새의 깃털을 실어 날랐다. 깔끔하게 핥아낸 사발 조각을 머리 위에 얹고 걸었다 조부의 아들들과 조모의 딸들이 남긴 인사를 받았다. 탯줄은 목에 감고 죽는 거란다 새로 해 넣은 관을 파냈다. 고라니가 죽은 자의 옷가지를 씹었다 덜렁거리는 발목에 아무개 之 墓를 새겨 넣었다, 破卯* 꺼진 무덤 위에 상수리를 파묻었다. 뱉어낸 고깃덩어리에서 김이 올랐..

검은 섬/ 김이녘

검은 섬 김이녘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늘 먹던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너는 따로 떨어져 골목 안에 올라서다 만 터키색 빛깔의 돌출간판을 구경하였다. 옥토퍼스, 떨어지고 있었다. 초서체로 흘려놓은 연체동물이 골목으로 번졌다. 너는 무엇의 가시 없는 짐승일까. 같은 낱말을 함께 쓰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달리는 바람을 타고 외투막이 펄럭였다. 공기는 생물처럼 흘렀다. 식탁 앞에서 한참 전에 떨어져 나온 너는 잠시 멈추어 섰다. 골목은 젖을수록 익숙해졌다. 다시 한 가지 낱말들로 주머니가 채워졌다. 길 밖에서 그넷줄에 앉은 그림자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옥수수 술과 찰떡과 흰 밥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그들은 펄럭이는 비닐 옷자락 속에서 한 덩어리를 꺼내 권한다. 손이 모자라는 너는 여러 빨판 중의 하..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3 정숙자 당신은 애인들을 위하여 많은 태양을 갖고 계십니다. 마치 개울물과 호수를 위하여 수ᄆᆞᆭ은 달을 풀고 계신 것처럼. 저는 그 애인들과 태양을 질투에 들이지 아니합니다. 분배된 만큼의 빛만으로도 꽃 총총 열 수 있음을 어느 아침 매화가 귀띔해 주었습니다. (1990. 9. 20.) 멀리 보이는 산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에겐 카프ᄏᆞ와 칸트와 니체 같은 이름들의 봉우리 위로 피어오르고 지나가는 구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문/학은 대지를 빛내며 유유히 사유하는 강물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가끔 그 언덕을 따라 걸었지만, 끝ᄁᆞ지 가지는 못하고 바람에 옷깃을 맡기며 감동과 경외감만을 띄워 보낼 뿐이었습니다. 차츰 나이 들면서 그들의 의지는 그들이 뿜어낸 피요, 뼈라는 게 ..

오늘 우리는/ 박마리

오늘 우리는 박마리 오늘도 우리는 섞인다 섞인다는 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것으로 밥 먹은 지 오래되었어도 어제 밥 먹은 것처럼 다정이 필요하다 그게 서로 알아 가는 것으로 나 자세고 너 자세라는 걸 우리는 안다 늘 같이해도 때론 같지 않을 때가 있다 같지 않다는 건 다른 것으로 너는 나를 이해 못 하는 거고 나는 너를 이해 못 하는 것이다 그건 네가 내가 되는 경험을 하지 않았고 나는 네가 되는 경험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내 안을 보지 못한 너를 이해하기로 한다 너를 이해하는 건 너의 일이 내 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거고 네 안을 못 보는 나를 이해하는 건 너 또한 네 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괜찮아, 그게 뭐라고. 이런 너도 이미 나를 안다는 거고 괜찮아, 이해해 이런 나도 이미 너를 ..

허블 씨, 은퇴를 앞두다 외 1편/ 김성진

허블 씨, 은퇴를 앞두다 외 1편 김성진 대기권 저 너머 세상을 읽는다고 했어 빛의 왜곡을 벗어나는 것은 편견을 버리는 일 그의 나이 서른세 살, 예측보다 두 배나 살았지 간혹 관절염이나 백내장 따위의 노인성 질환을 앓기도 해 읽는다는 것은 닳는다는 법칙이 있는 거야 차라리 읽지 말아야 했어 얼마 전 또다시 시력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흐린 각막을 걷어내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거야 그래, 다시 눈을 뜨긴 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에게 휴식을 주어야 해 짐작건대 그의 은퇴가 가까워지고 있어 결코 나이 때문만은 아니야 더 멀리 보기엔 그의 시야는 한정되어 있어 세상은 정체를 원하지 않아 마침 반기운 소식이 들려와 그를 능가하는 후임자가 온 거야 그의 이름은 제임스 웹이라고 해 더 먼 세상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에스프레소/ 김성진

에스프레소 김성진 오래전 눌렀던 벨이 이제야 들립니다 설익은 오이 꼭지처럼 쓴맛입니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요, 재즈음악이 들여옵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하루라고 해 두지요 안과 밖, 중간 즈음에 소리가 존재합니다 경계에서 생긴 쓴맛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네요 하루를 깨끗이 씻어 욕조에 넣어버립니다 목덜미가 서늘해 옵니다 바닥까지 발이 닿지 않아 숨이 가빠옵니다 지나간 것은 다시 지나가지 않습니다 욕조 속 온기는 그렇게 죽어갑니다 황홀한 음악이 들려왔고 잘린 슬픔이 하나씩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벨소리는 어제를 하나하나 해체합니다 떠난다는 말이 이제야 들립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가 행인의 발목을 붙잡았듯 시인의 시 또한 우리를 깊고 진한 존재론적 매혹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