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이건 바다코끼리 이야기가 아니다 외 1편/ 정끝별

검지 정숙자 2023. 12. 18. 01:50

 

    이건 바다코끼리 이야기가 아니다 외 1편

 

     정끝별

 

 

  빙하가 녹아내리는 알래스카에서는

 

  지느러미를 팔다리 삼아

  기다란 송곳니를 지렛대 삼아

  배밀이 구걸을 하듯

 

  살 곳을 잃은 수십만 마리 무리가 해안가로 몰려든다

  해안마저 발 디딜 틈이 없어지면 살기 위해 절벽을 오른다

  한 몸 숨 쉴 곳을 찾아 기어오른다

 

  그러나 더 기어오를 수 없는 벼랑 끝은

  찰나의 유빙, 착시의 바다, 그때

  허공에 허구의 날개를 펼친다

 

  옥상에서, 난간에서, 팔다리를 펼치듯

 

  절박이 절벽을 부르고

  착각이 착란을 부른다

 

  바위에 부딪쳐 내장이 터질 줄도 모르고

  퍽퍽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줄지어 절벽을 오른다

 

  빙하로 가는 길인 줄 알고

      -전문(p. 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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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루밍 블루

 

 

  무언가를 

  묻고 온 밤에는 꼭 계절을 묻게 된다

 

  땅이 얼지는 않을지

  물에 뜨거나 쓸리지는 않을지

 

  무언가를

  태우고 온 밤에는 또 바람을 살피게 된다

 

  연기는 얼마나 머물다 갈지

  남은 재는 어디로 불려 갈지

 

  그런 밤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그런 밤에는 어린 고양이도 체온을 나누려

  주르륵 품으로 흘러들었다

 

  먹는 걸 잊었으나 배도 고프지 않았다

 

  눌렸다 멈춘 내 숨에 내가 놀라 깨면

 

  어린 고양이가 칫솔 같은 혀로

  내 젖은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전문(p.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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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모래는 뭐래』 에서/ 2023. 5. 4. <창비> 펴냄

  * 정끝별/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문학사상』 신인상 시 부문 당선 &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시집『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은는이가』『봄이고 참이고 덤입니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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