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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_도공의 유비와 순수의 본면(발췌)/ 도공 : 채길우

도공 채길우 아이는 밤새 또래들과 술을 마시다 돌아왔다. 도대체 왜 사냐, 묻지도 않고 그가 아이를 향해 손부터 들어올릴 때 더이상 아이는 그를 피하지 않는다. 언제 낳아 달라고 했어? 말문이 막혀 멈춰 있는 동안 문득 호젓하고 파란 문양 같은 표정의 아이가 그새 많이 컸다. 가마 곁에서 갓 구워진 흠집 난 것들을 부수어야 했을 때 어째서 그릇이 아니라 제 손을 치지 못했던가 유약 바른 눈동자 속에서 물레와 함께 빙글빙글 부풀어 오르다 반드럽게 뭉개져 흘러내리는 구겨진 점토만큼 맑은 것 저 파이고 금이 간 자국을 닦아주어야 할까, 망설이다가 이제 자신이 깨뜨리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그는 손을 거두고 바라다본다, 손가락 사이로 가만히 처음 마주하는 작자 미상의 작품처럼 아이가 많이 자랐다..

결혼식과 시상식/ 한명희

결혼식과 시상식 한명희 하나만 남기고 다 버릴게요 집 안 정리를 도와주러 온 도우미 아줌마가 하나만 남기고 다 버릴게요 할 때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한다 하나하나 사연이 있고 제각각 용도가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매정할 수가 있는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들은 쓰레기봉투로 던져진다 가차 없이 버려진다 정리하는 건 결국 버리는 것이다 하나만 남기고 모두 버리는 것이다 결혼식이 그렇고 시상식이 그렇다 반듯하지 못한 내 생활도 결국은 버리지 못해서 생긴 일 망설이고 망설이는 사이 어질러지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 삶이 증명하듯 남은 하나가 최고는 아니었다 결혼식이 그랬고 시상식이 그랬다 생각이 늘어나는 사이 쓰레기봉투는 하나 가득이 된다 나는 하지 못하는 일을 저렇게 가뿐히 해내는 사람이 있다..

무국적 발자국/ 김보나

中 무국적 발자국 김보나 창밖으로 싸락눈이 흩날렸다 저녁에는 내 방으로 친구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으로 탄생할지 내기를 했다 지혜는 뱀 은민이는 식충식물 사람을 고르는 쪽은 없었다 케이크의 초를 끄면 눈앞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하루 생일이 좋았다 내게 말을 거는 자를 적의 없이 바라볼 수 있어서 타인이 건네는 말을 덜 두려워할 수 있어서 코끝에는 연기 냄새 어두워진 세상에서 다들 제 몫의 접시를 쥐고 서 있다는 걸 안다 우리는 형광등을 켜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에 숟가락을 들이대며 웃었다 케이크를 자르면 빈 공간이 커지고 날 부르는 목소리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해도 한 번쯤 불을 껐던 그 입으로 누군가를 새로이 축복할 수 있기를 떠나가는 자가 눈에 남긴 발자국을 보며 ..

빛 한 상자 외 1편/ 권현형

빛 한 상자 외 1편 권현형 사물이 있던 자리의 잔상은 빛을 받고 있어도 가파르게 어둡다 난간 위의 햇볕과 난간 위의 물방울은 연설과 웅변으로 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놓쳐버리기 쉬운 이정표들은 들어가도, 들어가도 거울 속이다 평생 쓸 수 있는 햇볕이 그곳에 모여 있다 베어진 마음, 베어진 언어들의 씨앗이 먼 곳으로 날아가 맨드라미로 채송화로 피어 있다 오래 불행한 사람, 병이 깊은 사람은 자신을 감자 싹 도려내듯 파내버린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파내버리지 않겠다 부적 삼아 지도 삼아 늘 상자에 담은 시를 안고 표류해 왔다 이정표를 놓친 즈므*에서도 시는 주근깨처럼 갖고 있었다 빛을 타고나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빛이 되어야 한다 -전문(p. 116-117) * 즈므: 강릉의 큰길 안쪽에 숨어 있는 마을 -..

아마도 빛은 위로/ 권현형

아마도 빛은 위로      권현형    빛의 총량이 운명의 총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보라가 고혹적인 것은  기다릴 줄 알기 때문일 거다  꽃집 주인은 보라색 꽃이 강하다고 했다  천천히 시든다고 했다   멀어져가던 너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피아노가 그렇듯  모든 것을 껴안고 있는 눈동자   어둠을 싫어하는 네가 어둠 속에서도 그리 빛나다니  잠 속의 통각은 바깥보다 아프다  가슴 한복판이 끌로 도려낸 듯 아려와 새벽에 눈을 떴다  청동 그릇에 새겨진 물고기처럼  해가 길어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천천히 시드는 색감의 운명을 사랑하고 싶다  여름꽃을 한 아름 안겨주고 너는  난생처음 보는 여행자처럼 오른쪽 등의  지도 무늬까지 지우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진하고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4 정숙자 아득히 먼 곳을 동경하기보다 제 몸담은 이 땅을 사랑하겠습니다. 제 영혼을 도와준 풀꽃, 이슬, 바람이 사는 이 흙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겠습니다. 그들이 제게 준 기쁨을 갚으려면 몇 생을 바쳐도 부족하겠지요. 이 행성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아름다운 별입니다. 제가 죽은 뒤 공기가 되면 이 지구를 지날 때마다 꼬옥 안고 한참씩 머물다 가겠습니다. 돌아보며, 돌아보며··· 가겠습니다. (1990. 9. 21.) 한 번 쓴 물 잘 간수하여 다시 사용할 때 행복하다 스카치테잎 잘 떼어 여기저기 다시 쓸 때 뿌듯하다 헌종이에 생명을 한 번 더 부여할 때마다 산뜻하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매시간 보람 있고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런 건 시가 아니고, 책이 아니며, 돈도 아니지..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4/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4 정숙자 아득히 먼 곳을 동경하기보다 제 몸담은 이 땅을 사랑하겠습니다. 제 영혼을 도와준 풀꽃, 이슬, 바람이 사는 이 흙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겠습니다. 그들이 제게 준 기쁨을 갚으려면 몇 생을 바쳐도 부족하겠지요. 이 행성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아름다운 별입니다. 제가 죽은 뒤 공기가 되면 이 지구를 지날 때마다 꼬옥 안고 한참씩 머물다 가겠습니다. 돌아보며, 돌아보며··· 가겠습니다. (1990. 9. 21.) 한 번 쓴 물 잘 간수하여 다시 사용할 때 행복하다 스카치테잎 잘 떼어 여기저기 다시 쓸 때 뿌듯하다 헌종이에 생명을 한 번 더 부여할 때마다 산뜻하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매시간 보람 있고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런 건 시가 아니고, 책이 아니며, 돈도 아니지..

지나가는 사람들 외 1편/ 안경원

지나가는 사람들 외 1편 안경원 비에 젖은 아카시아 나무가 하얀꽃을 주렁주렁 달고 비바람에 휘청대는 언덕 아래 빈터를 서너 바퀴 돌다 작은 카페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점화 마스크 쓰고 가는 저 꼬부장한 노인네는 성격이 어떨까 꽤 까탈스러워 보이네 멋을 한껏 낸 청바지 차림의 저 할머니는 기분 좋을 때는 어떨까 나쁠 때는 어떨까 이야기 나누며 다정한 젊은 남녀는 싸울 때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 옆에 바짝 붙어가는 초등학생 딸은 엄마를 언제까지 의지할까 꽤 친했던 그 친구와 왜 소식을 끊게 되었을까 가끔 낯설게 보이다 서로의 가면을 보게 되었을까 생각이 비슷했던 그는 술 마시면 비뚜름 떫은 것이 많아 그것도 비슷한 줄 알았는데 서로 경쟁자였었나 누군가는 시 쓰는 나를 순수의 이이..

덧없다, 숨다, 생겨나다/ 안경원

덧없다, 숨다, 생겨나다 안경원 1동과 2동 사이로 까치 예닐곱 마리의 비행 겨울 저녁 흐린 하늘에 그어진 동선은 금세 사라지고 새들은 은행나무 빈 가지에 모여 앉았다. 이름은 몰라도 아는 사이로 너와 나 사이로 나비 날아다닌 적도 있었고 혼자된 산비둘기가 지나가던 적도 있었지 나비는 맴도는 동그라미와 길게 끄는 곡선을 지어놓더니 날아가 버렸고 산비둘기는 오래 구구대며 지그재그 끈을 그어놓고 날아가 버렸지 사이를 오가며 실선 같으나 가상의 선을 끌어가며 얽으며 헝클어 놓기도 하는 그들 아늑하기도 어지럽기도 가시에 찔린 듯도 발을 옮겨 짚는다 극명한 현실이 순간의 주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다니 빙하의 크레바스 같기도 한 너와 나, 나와 그, 그와 그들, 그들과 나/너 사이 흐르는 메신저와 명멸하는 문자들로..

내가 사는 법/ 권기만

내가 사는 법 권기만 백 년 후가 궁금해 푸른 이끼로 돋았다 말라도 다시 살아나는 우기에 한껏 몸 부풀리는 건 마르고 쪼그라들어도 머나먼 깊이에 생명을 숨겨 둘 수 있어서다 그러니 눈곱만큼의 그늘은 남겨 두시라 약한 먼지 한 톨 날리지 않아도 나는 무사하다 장미의 5월은 견디므로 깊어진 내 물관에서 피어난 꿈 농작물도 아니고 풀도 아니어서 나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방치해도 된다는 안심이 나의 생본법, 내 몸이 거적때기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 물이 많으면 되레 썩는다 황량과 폐허가 달의 근간을 가리고 서성이는 체온이 바이칼 호수 그 깊이 모를 수심에 닿아 있다 잔디도 아니고 넓게 번식하지도 않는다 기생식물처럼 나무 그늘 밑이나 바위틈에 산다 먹어 보면 씁쓰름해서 뱉어 낼 뿐 화분의 덮개나 물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