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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을 하고 싶었어/ 여한솔

숨바꼭질을 하고 싶었어 여한솔 식물원이나 숲엔 유령이 많을 것이다. 유령을 유리병에 모아 흔들면 예쁜 소리가 난다. 종소리나 모닥불을 만지는 것처럼 유령 하나가 버섯 사이에 누워 낮잠 자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하지만 유령을 볼 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 그것 참 슬프군. 정수리 위로 참나무 그림자가 녹는다. 주말 아침이 너무 차가웠다 -전문(p. 132) --------------------- * 『동행문학』 2023-겨울(5)호 에서 * 여한솔/ 2021년⟪매일신문⟫ 신춘문예로 시 부문 등단

자살은 병입니다/ 김태

자살은 병입니다 김태 '자살은 병입니다. 치료하세요.' 노인 자살률이 높아졌다며 막막해하는 보건소장에게 그런 현수막을 걸면 어떻겠느냐고 말하고 돌아오는데 '사는 맛이 있어야 살 거 아니에요?' 배웅하던 여성 계장이 푸념해서 돌아오는 내내 그 말이 뒤를 따라왔다 사람과 돈 다 곁에서 떠나버리면 사는 재미는 없고 병든 몸과 화만 남아서 남은 것은 바람 스미는 낡은 헛간 같지 않을까 사람과 돈, 사람과 돈, 사람과 돈 되뇌다보니 내가 예전에 뭔가를 동경했었다 싶은 기억이 부끄럽게 떠올랐다 사람과 돈이 아니어도 살아갈 만한 삶이 있다고 믿었는데 거기선 고독도 못난 일이 아니고 가난도 부끄러울 것 없어서 홀로 고요하고 평안한 삶! 사는 것이 그렇게 매끈할까, 젊음처럼 매끈할까 이를테면 밭의 잡초를 뽑으며 봄을 보..

멀리를 품다/ 김익경

멀리를 품다 김익경 바다가 보이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바다가 있는지 모른다 단지 바다가 있었다 바다를 보기 위해 이사를 한 것도 아니다 처음 바닷가를 둘러본 것은 옆집에 인사하듯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 후 나는 옆집도 바다도 멀리한다 멀리는 얼마만큼의 거리인지 나는 모른다 바다가 보인다고 꼭 바다를 봐야 하는 걸까 이제껏 바닷가로 피서를 가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매일 바닷가에서 바닷가로 출근하고 바닷가로 퇴근한다 질긴 바다, 질긴 것들은 모두 봉인된 관처럼 함부로 뚜껑을 열 수 없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위로합니다 바다에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다 바다는 멀리를 품고 있다 자꾸만 바다가 나를 가깝게 한다 나는 언제든 멀리 가고 있다 -전문(p. 114-115) ----------..

박채경_나그네의 시인 박목월(발췌)/ 이별가 : 박목월

이별가 박목월(1915-1978, 63세)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전문- ▶ 나그네의 시인 박목월(발췌) _박채경/ 문학평론가 흔히 창록파의 시인으로 알려진 막목월의 본명은 박영종이다. 그는 1915년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에서 아..

프리지아 멜링꼴리아/ 전희진

프리지아 멜링꼴리아 전희진 프리지아를 사들고 오는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꽃이 담긴 마켓봉지가 가벼웠어요 문득 꽃이 왜 가벼울까 풍선도 아닌데 그런 아득한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들은 그래서 병문안 갈 때 꽃을 사가는 것일까요? 가벼이 떨쳐내라고? 무거운 꽃이 있다면 세상 끝까지 따라나설 생각입니다 따라가서 발목에 샌드백처럼 내 양쪽 발에 노랗게 피어난 꽃을 달고 마음껏 달려보고 싶습니다 자꾸 가벼워지는 마음을 닻으로 가라앉히고 싶습니다 지금은 강변을 걷겠습니다 꽃을 보고도 꽃을 흔들며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을 보고 있는 나를 고양이가 가게에 들어와서 나가지 않아요 눈에 뵈지 않는 고양이를 지울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고양이가 여기저기 똥을 싼다고 마시레야가 울상입니다 가지고 있던 걸 도난당하면 가벼워질까요..

용량 제한/ 김일태

용량 제한 김일태 잊히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넘어져 본 이들은 안다 잊는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다시 일어서 본 이들은 안다 잊힌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위해 자리 비워준 것이기에 잊지 않으면 잃은 게 아니다 나이 든 이들에게 오랜 기억보다 금방의 기억을 먼저 지우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초과 저장되어 넘치지 않도록 신은 우리의 머리 기억용량을 200기가바이트 정도로 제한해 두었다 -전문(p. 88) --------------------- * 『동행문학』 2023-겨울(5)호 에서 * 김일태/ 1998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부처고기』외 8권, 시선집『주름의 힘』등

등감* 외 1편/ 엄세원

등감* 외 1편 엄세원 한 줄기 빛이 안으로 스며들자 갇혀 있던 천오백 년의 기운이 되살아났다 순식간에 소환한 마지막 날의 동정 단 하나의 등감만이 벽돌무덤 안쪽 묘실 끝까지 지켰을 거다 불이 꺼지는 순간, 깊은 잠이 켜지고 있었을 거다 중심이 되어 내려다보는 자리 금방이라도 백제의 달을 데려와 어둠 밝히고 연꽃 문양을 키울 것만 같다 왜 하필 복숭아 모양이었을까 죽어 있는 신선은 떠올리진 않았을 거다 아니, 뼈마저도 흩어졌으니 이미 신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왕의 무덤 건드리면 재앙을 부른다는데 그 풍문은 아직도 유효할까 왕릉을 갔다 온 날, 꿈속에서 나는 등감이 되었다 아득하게 먼 신전에서 오래 앓던 불씨 하나 기포 속으로 끈질기게 파고든다 봄의 중심에 쟁여놓은 다 타오르지 못한 몽우리 하나 몸 허투루..

관(觀), 시(視), 찰(察)/ 엄세원

관觀, 시視, 찰察 엄세원 부릅뜬 홍채를 스쳐 가며 비춰보는 등대 관觀의 번짐이다 어쩌면 사내의 몽환인지도 다음, 그다음 또 그다음의 물결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솟아 있는 바위는 시視다 어쩌면 사내의 내세인지도 머리카락이 파도에 흐물거리면 뒤이어 포말이 핥는다 모래 알갱이들 입과 귀와 코를 드나든다 밀물에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달그락 덜그럭 조가비가 끼어온다 홀연 파도 머리에서 수색해 오는 바람, 큰 물결 겹겹 헤아리면서 백사장을 당겨온다 한때 몸부림쳤을 흔적을 어깨가 끌어안고 있다 맨발을 헹구는 몇 가닥의 수초, 푸르뎅뎅한 발가락을 가려준다 죽음은 둥글다 둥긂, 몸을 떠나 다시 둥긂으로 박동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 박혀 있는 닻이 찰察이다 제 모서리를 버리며 마모되는 필연 짤랑거리는 동백잎들, 청보랏..

나는 세상 알고도 살았노라* 외 1편/ 김효운

나는 세상 알고도 살았노라* 외 1편 김효운 진 땅 마른땅 다 밟아 보고 첫눈에 선인을 알아보는 여자 술잔에 달라붙는 하루살이 같은 사내들 눈 하나 깜짝 않고 난장에 나온 오이인 줄 덜퍽 손목 잡는다면 거침없이 닭 모가지 비틀 듯하는 고락을 하는 입술에 침 바르며 발소리 뜸할 때마다 책장을 넘긴다 비워지는 발자국만큼 채워지는 책장 명절 장에 나가듯 참여한 동네 백일장 나는 세상 알고도 살았노라 속내 털어놓으니 눈 밝은 이를 만나 어엿한 시인 목록에 올랐다 어머니 말씀대로 밥도 돈도 나오지 않는 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함박웃음으로 엄마가 시인이라니 벙글어진다 부끄럽다 생각한 적 없는 주점 간판을 새삼스레 바라본다 나는 세상 알고도 살았노라 -전문(p. 106-107) *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변용..

연날리기/ 김효운

연날리기 김효운 온몸이 날개인 것들이 있다 가는 뼈대를 세워주고 골다공증 예비하듯 밥을 먹인다 먹인 밥 또 먹인다 바람을 타기엔 질긴 것이 좋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씌우는 소망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처럼 짧게, 숨통 틔우듯 가슴 복판을 뻥, 틔우고 아끼는 것일수록 목줄을 매야 한다니 무명실을 얼레에 감고 바람 부는 벌판으로 나간다 내게서 태어난 솔개 한 마리 먼 하늘로 향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연은 잘 비워야 공중으로 난다. "온몸"이 날개가 되려면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뼈가 비어야 한다. 우리는 물론 그런 새의 뼈와 같은 것을 직접 만들지는 못한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가는 뼈대"를 만들어 비움을 품을 수 있는 "온몸"을 만든다. 그리고 이 비움을 튼튼하게 하려고 "밥"을 먹이고 "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