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지나간다 외 1편
이재연
이제 어디에도
지난날은 없다
순식간에 여름이 사라지고 포도알에서 술맛이 난다
술맛을 알고 생활을 이기려고 했지만
나를 이기려고 했지만
결국 잃는 것은 나였지만
입술 끝에 허망한 것들이 매달려 있다
마른 잎사귀를 털던 바람도 햇빛도
한번은 죽어라 바라보고 싶은 감정으로
아직 영원을 발명 중이다
정말이지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신을 죽이는 것보다
신을 꿈꾸는 것이 낫다
목줄을 길게 풀어놓은 아이들이 지나간다
느닷없이 입에서 신맛이 난다
눈을 감고 신맛을 삼키면 어른이 되어 있다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세상을 조금 앓은 나이 어린아이는 짐을 싼다
멀리 강원도로 갈 것이라고
이 추운 겨울 저녁 허투루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아이는 짐을 싼다
이제 나는 눈물이 없다
겨우 술맛을 알아 어디에서도 소수의 소수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만 같아 새벽에 자주 일어난다
뜨거운 것을 찾지만 혈색을 잃고
어두운 곳을 찾아 불을 켠다
이제 겨우 사는 이유를 갖추려고 하는 셈이다
-전문(p. 108-109)
---------------------------
이 지역은 화요일이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
누군가 지나간다
누군가 또 지나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다
추억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
손이 되었으면
발이 되었으면
이전보다 더 유연해졌으면 그러나
비굴해지지 않았으면
사실 너의 말은 너무 친절해
어디에서도 머물고 어디에서도 머물지 못했다
아무도 모르게 추억을 버렸다
친구가 있었고 친구가 아닌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속에 있었다
그 속에 누가 있었다
무엇이 올 것만 같았다 거기
그런 하늘이 있었다
-전문(p. 114-115)
---------------------
* 시집 『화요일이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 에서/ 2023. 12. 15. <파란> 펴냄
* 이재연/ 전남 장흥 출생, 2012년 제1회 오장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가는 사람들 외 1편/ 안경원 (0) | 2023.12.26 |
---|---|
덧없다, 숨다, 생겨나다/ 안경원 (0) | 2023.12.26 |
단순한 미래/ 이재연 (0) | 2023.12.25 |
복서(Boxer) 외 1편/ 이희주 (0) | 2023.12.24 |
돌아오는 길/ 이희주 (0) | 2023.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