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er 외 1편
이희주
복서를 꿈꾼 적 있었지
다른 아이들 주로 트레이닝복 등판에 KOREA를 붙이고 다닐 때 나는 BOXING을 붙이고 다녔지 두들겨 패려면 그만큼 두들겨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챔피언은 항상 쓰러져도 다시 일어섰으므로 피를 흘려도 마지막엔 언제나 웃었으므로 너무 멋져 꾸었던 꿈
그게 진정 나의 꿈이 아니었을까?
그래, 복서의 길을 걸었어야 했어 세상과 맞닥뜨려 깨고 부수고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고 일어나 또 덤벼야 했어 인생을 섣부르게 안 탓에 너무 빨리 꿈을 버렸어 순한 양이 되어 너무 일찍 세상에 잡아먹혔어 그런데도 아직 나는 없지 않고 있어
주먹 없이 우두커니
-전문(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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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있는 이유
너 그거 아니?
벽돌의 운명은 무너지는 데 있어
쓰러질 일이 없다면 세울 필요도 없겠지
유리잔이 가냘픈 것은 깨질 운명 때문이야
너의 입술이 위태로운 것처럼
오늘도 바람이 불었겠지 나는 보지 못했어
흔들리는 꽃잎을 본 거야
넌 간지럽듯 즐거웠을 거야
부서지지 않으면 파도가 아니지
내가 언제까지 어디까지 다가가 쓰러질까?
너의 젖가슴에서 무너져 줄까?
물새들이 발자국을 남긴 그 모래 해안에서
물새들의 문장紋章을 읽으며
나도 모래처럼 모래 속으로 사라져 줄까?
그래, 뜨겁게 네가 핥으면 돼
그래서 내가 너에게 있는 거야
-전문(p. 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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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내가 너에게 있는 이유』 에서/ 2023. 12. 18. <문학의전당> 펴냄
* 이희주/1962년 충남 보령 출생, 1989년『문학과 비평』에 시 1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저녁 바다로 멀어지다』, 地上同人 시집 『물에 의지하는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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