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김성진
오래전 눌렀던 벨이 이제야 들립니다
설익은 오이 꼭지처럼 쓴맛입니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요, 재즈음악이 들여옵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하루라고 해 두지요
안과 밖, 중간 즈음에 소리가 존재합니다
경계에서 생긴 쓴맛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네요
하루를 깨끗이 씻어 욕조에 넣어버립니다
목덜미가 서늘해 옵니다
바닥까지 발이 닿지 않아 숨이 가빠옵니다
지나간 것은 다시 지나가지 않습니다
욕조 속 온기는 그렇게 죽어갑니다
황홀한 음악이 들려왔고
잘린 슬픔이 하나씩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벨소리는 어제를 하나하나 해체합니다
떠난다는 말이 이제야 들립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가 행인의 발목을 붙잡았듯 시인의 시 또한 우리를 깊고 진한 존재론적 매혹에 사로잡히게 한다.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건넨 "떠난다는 말"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쓴맛을 느끼게 했을지라도 그것을 가만히 음미하다 보면, 떠나려는 이와의 소중한 인연과 함께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선사하는 감미로움이 뒷맛으로 다가오는 때도 분명 있었으리라. 이처럼 시인에게 어둠은 단지 쓴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 시에서 우리가 존재로서 마주하게 될 세계의 안과 밖, 또는 사랑의 시작과 끝이라는 "경계에서 생긴 쓴맛"에 자아내는 "오랫동안"의 여운은 시간이 갈수록 처음의 쓴맛을 넘어 또 다른 맛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황홀한 음악" 뒤에 감춰진 "잘린 슬픔"의 뒷맛을 느낄 줄 아는 이만이 존재에 대해 더 깊고 진한 고민을 할 수 있다. (p. 시 39/ 론 127) (정재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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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에스프레소』 에서/ 2023. 11. 6. <실천> 펴냄
* 김성진/ 2016년 『시와사상』으로 시 부문 & 2015년 『에세이문학』으로 수필 부문 등단, 시집『억울한 봄』, 수필집『그는 이메탈을 닮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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