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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정창준

곡우 정창준 못자리를 파내야 하는 날 덜어 낸 자리에는 기억이 차오를 것이다 마음은 붉은 무릎 같은 비탈을 만들어 왔다 비탈은 웅덩이를 만들지만 모든 웅덩이가 생명을 키우는 것은 아닐 터, 더운 빗줄기가 되고 싶었던 철없는 시절, 나는 조바심을 갖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없는 동안, 그래서 나는 궁금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절대 묻지 못했던 물음 남쪽에서는 오늘을 기다려 나무가 속에 담아 둔 체액을 모아 마신다고 했다 물푸레나무가 차곡차곡 접어 둔 기억을 받아 마시면 다툼이 없어진다는데, 이방인에게 더 효험이 있다는데, 곡우란 먼 곳에서 올 사람을 아침부터 기다려야 하는 날 다툴 수 있는 관계라도 되고 싶었습니까? 절대 답하지 못했던 물음 솔가지를 덮고 볍씨를 불리듯 당신의 먼 어린 날을 생각..

밤의 디스크 쇼 외 1편/ 장석원

밤의 디스크 쇼 외 1편 장석원 라디오 세계의 인간은 싱글벙글 희망곡은 나를 신청하세요 사랑받기 위해 봉사받기 위해 라디오는 우리의 희망 라디오는 우리의 첫사랑 라디오는 이웃 누나의 상냥함 라디오는 가내수공업의 조력자 라디오 속으로 이마 번득이는 파도 위로 한 잎 사연을 띄우고 실버들 같은 우리의 슬픔 물잠자리처럼 지직거리는 라디오 일어날 모든 일이 라디오에 눈꺼풀, 눈꺼풀, 스의치, 딸깍딸깍 라디오는 저 먼 여인숙의 속삭이는 불빛 우리는 반복적인 잡음 다음 곡은 나미의 오늘밤의 입구 너머에서 환한 침묵 깜박거릴 때 라디오 속사포 우리를 우그러뜨리네 -전문(p. 58-60) ---------------------- 추억의 성동교 다리의 남쪽과 북쪽 석양과 한 줌 그리움 새의 부리와 다가오는 불빛 불빛 이..

히어로(Hero)/ 장석원

Hero 장석원 가지를 물고 꼭대기로 날아가는 새 진보의 끝 망상적인 외로움이 파괴되자 그 누구도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이 실현되었다 너는 전향을 위해 나를 이용하고 나는 너를 위해 열렬히 나를 소모한다 상처를 노출시킨다 변태한다 잠적하기 위해 체모를 밀어버린 우리는 안도감에 젖겠지 세상의 개변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래를 위해 순교 고독 앞에서 동맹) 투쟁과 윤리와 노조는 사어 불가능한 행복을 향해 나는 손오공이 되어 날아오른다 (근두운!) 긴 권태와 짧은 공포여 세상은 더욱 잔인해지고 우리는 우리끼리 마스터 앤 서번트 플레이 -전문- 발문> 한 문장: 문단의 선후배로 장석원 시인을 알고 만나온 지 십수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의 만남이라야 여러 문우들과 어울리는 술자리 ..

송기한_미메시스적인 뚜렷한 응시와···(발췌)/ 소금쟁이 : 박이도

소금쟁이 박이도 수면水面은 투명透明한 대리석大理石 조심스레 내려앉은 구름과 밀어대는 실바람에 두둥실 소금쟁이가 등장한다 가벼이, 날렵하게 춤추는 물 위의 춤꾼 수면에 미끄럼을 지치다가 돌연 허공을 훌쩍 넘어 뛰는 곡예사 수초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신기神奇 실바람 꽃바람 원무곡圓舞曲에 맞춰 빙글빙글 원무를 그리는 소금쟁이 -전문- ▶ 미메시스적인 뚜렷한 응시와 그로부터 피어나는 생생한 자연/-박이도의 시세계(발췌)_ 송기한/ 문학평론가 자연에 대한 섬세한 미메시스적 묘사는 인용 시에 이르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지금 화자는 고인물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소금쟁이를 유난히 응시한다. 미세한 관찰이 얻어내는 시적 의장이 이미지즘의 수법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그것이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근본 동..

마침내/ 서경온

마침내 서경온 기다리던 산사태 일어났다 백 년 전에 매몰되었던 아픈 기억의 전설 위태롭던 노르웨이 베슬레머넌 산봉우리 무너졌다 차마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아침마다 하늘 바라보며 이주를 마다하던 마을 사람들은 열일곱 번째 경보로 대피하다가 엄청난 토사와 바위가 쏟아져 내릴 때 천둥처럼 환호하였다 앞으로 한동안은 안심하리라 우리 생애 몇 번쯤 어느 길목 골짜기 마을 떠나지 못하고 날마다 하늘 기색을 살피며 숨죽이며 기다리는 일 있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차라리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관계의 시간 공포가 불안보다 낫다는 말 이제는 알겠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전문(p. 76) --------------------- * 『동행문학』 2023-겨울(5)호 에서 * 서경온/ 1980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하..

지점 외 1편/ 정진혁

지점 외 1편 정진혁 머물러야 할 곳이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서부터 멀고 어디서부터 가까운지 알 수가 없다 끝을 보기 위해 땅끝까지 간 적이 있다 끝에서 돌아설 때 막막함이 왔다 가야 할 지점이 어딘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느 꽃가지에 가야 그 어느 지점에 가야 당신과 내가 꼭 맞게 만날 수 있을까 한강의 시작은 태백 검룡소라는데 어디서부터 나는 나고 너는 너인가 이제 너와 나는 끝이야 그 끝이 어딘지 당신은 아는가 어느 한 점에 오래 머물렀지만 그곳이 이별이 시작된 지점인지 몰랐다 벚꽃을 보려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천국이라는데 어디서부터 왼쪽인지 어디서부터 오른쪽인지 아직 몰라서 천국을 가지 못한다 여름의 끝과 막다른 길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너의 지점으로 가기 위한..

내 전부는 밖에 있어서/ 정진혁

내 전부는 밖에 있어서 정진혁 처음 이 가방은 다른 가방과 똑같은 표정을 가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얼룩이 생기고 때가 타고 색도 조금 바랬다 멜빵 한쪽이 뜯어지고 자크 하나가 고장 났다 가방은 훨씬 자신만의 표정을 가진다 이 표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가방에 넣은 컴퓨터와 책과 간식거리와 옷들에 가방의 영혼이 잠든다 커피를 쏟은 얼룩과 손때 묻은 책들은 가방에 자신의 존재를 반영하며 가방에 침투하고 끝내 가방으로 변신한다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온다 아무렇게나 벗어 논 가방 위로 아침의 햇살이 비칠 때 우중충하고 냄새나는 가방이 환하게 빛난다 우중충한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로 빛난다 몇 십 년째 이 세상을 벌고 있는 나는 있음의 눈동자를 지닌 나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멀어지지 않는 헌신과 소..

유실물/ 박미산

유실물 박미산 지하철 두 대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오가던 지하철 창에 이십 대 그녀와 내가 완벽하게 합쳐졌다 그녀의 몸과 나의 얼굴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지하철을 달린다 단풍이 피어오른 지상은 눈부시다 축제를 했던 운동장은 어디로 갔는지 낯선 학교 건물들만 켜켜이 쌓여 있다 호랑이 어깨를 두드리며 미리 온 가을 졸업사진을 일찍 찍는 그들이 내 옆구리를 치며 달려간다 미친 목련, 다람쥐길, 대도관 모르는 길을 무조건 노 젓던 이십 대 최루탄에 흘리던 눈물 몇 날 며칠 고함질러 갈라진 목소리 끊어지던 문장들 황톳빛 물이 거리를 휩쓸 때도 구름 속에서 왔다 갔다 흔들리는 대낮의 햇볕은 이제 안녕 -전문(p. 104-105) ------------------------------ * 『동행문학』 2023-겨울(5)..

저곳과 이곳/ 구석본

저곳과 이곳 구석본 그분이 돌아가셨어요 휴대전화로 친구가 알려 왔다 늦가을 길 위에 낙엽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나무의 우듬지에 아직 남은 잎들이 바람에게 속삭인다 그분이 졸아가셨어요 방금, 낙엽을 줍는다 한 생을 돌고 돌아 돌아가신 그분, 여름 한 철 갈참나무를 갈참나무이게 했던 이파리 이제는 바스라져 갈참나무 이름이 지워진 채 바람에 휩싸여 돌아간다. 다시 낙엽이 떨어진다. 방금 돌아왔어요 이름이 지워진 채, 낙엽이 되었어요. 낙엽에는 이름이 없어요, 그냥 낙엽이 될 뿐이에요. 저 위를 보세요. 허공과 맞닿은 우듬지에 아직 남은 잎들이 펄럭인다 저곳을 돌고 돌아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마침네 돌아온 이곳은, 저곳에서는 아득한 허공이었어요. 낙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바람으로 돌아, 돌아간다. 허공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