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검은 섬/ 김이녘

검지 정숙자 2023. 12. 23. 16:25

 

    검은 섬

 

    김이녘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늘 먹던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너는 따로 떨어져 골목 안에 올라서다 만 터키색 빛깔의 돌출간판을 구경하였다.

  옥토퍼스, 떨어지고 있었다.

  초서체로 흘려놓은 연체동물이 골목으로 번졌다.

  너는 무엇의 가시 없는 짐승일까.

  같은 낱말을 함께 쓰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달리는 바람을 타고 외투막이 펄럭였다.

  공기는 생물처럼 흘렀다. 식탁 앞에서 한참 전에 떨어져 나온 너는 잠시 멈추어 섰다.

  골목은 젖을수록 익숙해졌다.

  다시 한 가지 낱말들로 주머니가 채워졌다.

  길 밖에서 그넷줄에 앉은 그림자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옥수수 술과 찰떡과 흰 밥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그들은 펄럭이는 비닐 옷자락 속에서 한 덩어리를 꺼내 권한다.

  손이 모자라는 너는 여러 빨판 중의 하나를 뜯어 받아 들었다.

  그넷줄에 높이 오를 때

  줄에 엮인 한 몸처럼 그림자들이 탄 버스가 바다로 스몄다.

  너는 그 자리에 남아서 흔들리는 그넷줄이 멈추길 기다린다.

  손안에 덩어리가 흡착되었다.

  여전히 허리춤에는 주머니가 문어 대가리처럼 덜렁거렸다.

  가슴 근처에 빨판처럼 들러붙어 주머니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타인들이 섬에 버리고 간 빈 주머니들이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한 곳으로 흘러갔다. 폐기될 수 있는 것들이라니.

  비우지 못한 것들을 매단 채 너는 같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비에 흘러내리는 초서체를 읽지 못하여 기어가다 죽어버린 것들을 옮겨 적었다.

  옥토퍼스, 연체동물, mollusca, 文語, an octopus, 그리고 섶돌.

  섬새가 뜨기 전 분리수거할 수 없는 주머니를 뜯어 일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빨판 자국이 검게 남았다.

  전사자의 다른 쪽 날개처럼 몸이 펄럭였다.

  바람이 따라붙으며 섬어하다

  너는 같은 의자에 앉아 아직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전문-

 

      * 纖語

 

  해설> 한 문장: 한편 '검은 섬'의 미로와 퍼즐의 큰 틀은, 수북한 "낱말"들과 "빈 주머니들", "겨울"과 "거울"의 조각들, 알 수 없는 기호와 소리들로 파편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호의 파편들은 시인을 포함한 누군가의 실종, 하나의 '사건'을 입증하는 일말의 단서들이다. 이 시집을 펼친 당신은 이제 실종 사건, 혹은 살인 사건의 (범죄) 현장에 들어선 셈이다. 미지의 '검은 섬'에 막 도착한 당신은 죽은 대상의 얼굴과 그 사인을 찾아야 한다. 시신의 사라진 얼굴(들)과 신원, 유서 또는 살해 도구, 기타 증거물들을 찾아야만 당신은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다. 먹물이거나 바람이거나 혹은 "문어"가 슬어놓은 작은 알들이거나 어쩌면 독약이거나 폭탄일 수도 있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당신의 해독을 기다리며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러나 일부 증거는 인멸되었거나 훼손되었다. 만만치 않은 숨은그림찾기, 미로찾기, 탐정놀이, 게임은 지금 막 시작되었다. 이처럼 김이녘의 시집 『더께』는 불완전하고, 다소 복잡한 미완의, 미스터리한 텍스트이다. 독자인 당신이 '더께'를 들추거나, 더 쌓아올리는 형식으로 마지막 퍼즐을 완성해야 한다. 고로 이 시집은 비정형의 여전히 '생성' 중에 있는, '오독'으로 실재화 되는 잠재태의 한 '실험'의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자유롭고도 분방한 그러나 지독한 '오독'으로 인해 당신은 또 하나의 '더께'로 기입될 예정이다. 상흔인지 방어막인지 두꺼운 각질인지를 알 수 없게  『더께』는 점정적인 '책'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섬에 입도한 당신이 '더께'의 아래, 심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혹은 '더께' 위에 『더께』를 탑처럼 쌓아 올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독誤讀의 더께'로 쌓아 올려진 언어의 옥탑屋塔, 그 옥탑屋塔 위에 옥탑屋榻, 그 위에 더 아슬아슬하게 흩어져 있는 낱말들이 첨탑 위에서 눈부시게 빛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빛의 반사는 오히려 독서를 방해한다. 그럴 땐 눈을 감고 무언가를 흩뜨리면서도 반사를 통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기호들을 만들어 이를 발화한다. 그것들은 탈의미화, 탈영토화, 탈코드화를 시도하는 동시에 의미화, 영토화, 코드화의 족적을 남긴다. 어쩌면 그것들은 지나온 과거들을, 먼지를, 잉여를, 결핍을, 상처를, 고통을, 기억을,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 흔적들을, 미래까지도 편린片鱗의 형식으로 반향한다. 텍스트 안에 다양한 목소리로 잔존하는 그것들의 발성을, 발화를, 마지막 메시지의 조각들을 맞추고 재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인 당신의 몫이다. (p. 시 11-12/ 124-126) (김효은/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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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더께』 에서/ 2023. 12. 5. <한국문연> 펴냄

  * 김이녘2000년 『시사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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