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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를 향한 고독 외 1편/ 윤명규

최후를 향한 고독 외 1편 윤명규 기러기 한 마리 구름의 옷자락에 매달린 채 끌려가고 있다 날 부러진 새벽 초승달 허공의 살 속에 예리하게 꽂혀있고 날개 죽지에서 울리는 낡은 베어링 구르는 소리 울컥거리는 추측 위로 떨어져 내린다 깨끗하게 씻은 아침을 부리로 물고 별들의 마을 골목 어귀 돌아 교회당 십자가 넘어 어머니의 길을 찾아 내달리고 있다 서리 찬 하늘을 밀어낸 아침 별들이 꼬리를 끌고 줄줄이 따라온다 무리에서 벗어난 기러기 무너져 내린 발자국이 굉음을 내며 끝없이 팽창한다 가다가 가다가 더 갈 곳이 없다고 느껴질 때 체념하듯 버리듯 그렇게 생을 놓는 것일까 숨찬 기러기 오던 길을 삼켰다가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다 이 아침 최고로 쓸쓸한 바람이 분다. -전문(p. 38-39) -------------..

줄/ 윤명규

줄 윤명규 유인줄에 오르는 토마토 줄기 하늘을 끌어내리고 있다 스스로 날지 못해 손발을 뻗어 창공을 갈취하고 있는 것이다 줄레줄레 태생의 한계 딛고 걸을 수 없어 허공에 합장하며 오체투지 중이다 줄은 줄을 부르고 줄로 줄을 서다가 목덜미 살 속을 파고 들어가는 줄 흑수저의 호강일까 가진 건 핏줄밖에 없으므로 -전문- 해설> 한 문장: 토마토 줄기가 줄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삶도 역시 줄이 필요하다. 줄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형성한다. 하지만 줄은 "스스로 날지 못해/ 손발을 뻗어 창공을/ 갈취하고 있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스스로 성장과 상승을 통해 하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성공하는 것이 줄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공에 합장..

작가 김성동의 글씨_'사행풍우(士行風雨)'/ 이동순(李東洵)

작가 김성동의 글씨 '사행풍우士行風雨' 이동순李東洵 참으로 귀한 편지와 글씨 하나를 찾았다. 우리 시대의 소설가 김성동(金聖東, 1947-2022, 75세)이 울분에 차서 거리를 쏘다니다 돌아와 분연히 편지를 쓰고 또 먹을 갈아서 떨리는 손으로 쓴 '사행풍우士行風雨'. 이 네 글자를 나에게 보내온 것이다. 『백석시전집』(창비, 1987)이 출간된 바로 그해 말이다. 나는 벗의 글씨를 서가의 받침대에 올려두고 틈날 때마다 그 앞에 서서 진정한 선비, 지식인의 삶을 어찌 살아야 하는지 혼자 곰곰이 음미하고 반추했던 것이다. 아마 이 제목으로 시도 한 편 썼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찾을 길 없다. 난세亂世란 것은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꼴이 보이질 않는데 이 혼탁한 세상에서 벗이 써보낸 '사행풍우'..

권두언 2024.01.04

연기법(緣起法) 외 1편/ 정복선

연기법緣起法 외 1편 정복선 세상이 나를 찍고 베어 내고 켜고 다듬네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로 이네 대청마루로 놓네 세상이 나를 빻고 빻아 명사산鳴砂山의 모래로 날리네 흩날리며 우네 사막 너머 투르판의 포도나무를 키우네 푸른 열매, 건포도가 되네 세상이 나를 덖고 볶고 찌고 말리고 삶아서 나물도 만들고 차茶도 만들고 약도 만드네 손가락에 남은 지문 희미하네 내 어머니도 그러하였고 내 딸 또한 그러하겠네 우울한 날에는 혼자서 구름을 덮고 눕다가 문득, 말을 타고 달려 나가네 -전문(p. 34) ----------------------------------- 카이퍼 벨트*에서 헤매는 그렇게 잊지 않고 싶었던가 이생에서 딱 한번 찔린 상처가 낫질 않아 영원처럼 떠도는 곳마다 눈꽃 흩날리는, 지금 어디만큼 맴돌고..

헌화가(獻花歌)* 2/ 정복선

헌화가獻花歌* 2 정복선 그대 창밖에 노래를 심어요 어제는 은방울꽃 그제는 수선화 오늘은 또 범부채꽃 매일 다른 새소리로 노래합니다 원시림 속을 헤매며 먹을거리에 급급했을 때도 독사와 여우의 가시덤불 숲에서도 꽃을 맨 먼저 발견한 사람 옷자락에 캐고 담고 싸안고 온 사람 둥지에 남아 뒤척이는 자를 위하여 거듭거듭, 유목의 허술한 둘레마다 마음 심어 두고 비바람 속을 헤쳐 가는 한 사람이 보이시나요 -전문- * 신라 향가에서 가져옴 해설> 한 문장: 위의 시에서 보듯이 (···) 화자는 "창밖에 노래를 심"는 자이며, "매일 다른 새소리로 노래"하는 자여야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의식이 한군데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시인은 늘 새로운 인식과 지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시..

실종/ 김애숙

실종 김애숙 종로에서, 을지로에서, 퇴계로에서, 강남대로에서, 한강대로를 건너는 버스 안에서 무수히 파주, 남양주, 분당에서 강릉, 해운대 바닷가에서 광주 금남로, 대구 동성로에서 물 건너 제주에서 그리고 용산과 여의도에서 보았다 '우리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수십 년째 거리 거리를 헤매는, 안타깝게 외면하는 저 현수막 오늘은 우리 아파트 앞에서 가을비에 젖고 있다 -전문(p. 134-135) --------------------- * 『동행문학』 2023-겨울(5)호 에서 * 김애숙/ 2001년 『문학예술』로 등단

퐁피두/ 장선희

퐁피두 장선희 미술관은 커다란 공장 같았지 외벽은 여러 개의 파이프가 붙어 있었어 햄스터 관 같은 투명 파이프 에스컬레이터로 수많은 관람객이 오르내리는 모습은 프란시스 알렉스의 행위예술 같았어 나야 뭐, 전공자도 아니고 미술은 상징이고 너머의 의미를 상상해도 된다는데 그 시간, 지중해 인근에서 지진이 일어났어 구호품과 구조견도 비행기를 타고 현장에 갔지 구조하던 사람들이 여진에 다치고 기자들이 취재 도중 대피하는 장면도 화폭이 될까? 아이들이 울부짖어, 피카소도 울부짖어 잔해 속에 팔 하나가 튀어나와 있어 게르니카 속 다리 하나도 툭, 둥근 지구는 사용 설명서가 더 복잡해지고 뉴미디어 전시관엔 설명 책자가 놓여 있었지 왜 당신은 이해하려고만 하십니까, 그림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어 샤갈, 칸딘스키, 달리..

소금쟁이/ 이원복

소금쟁이 이원복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은 마음이 가난해진다 두 마음이 한마음이 될지라도 아무도 그들의 가난을 비웃지 않는다 한 사람을 위해 버려진 많은 시간들이, 공간들이 연인들의 뒷모습에 숨어 다만 흐느낄 뿐이다 홀로 남겨진 자의 뒷모습은 빈 액자에도 차마 넣어두지 못한다 눈을 뜨면 후끈거리던 가슴 쪽으로 찬 서리가 하얗게 내려 남겨 둔 서로의 그리움조차 차갑게 거두어 간다 사랑하다 홀로 남은 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음을 생각하고 지난날을 생각하고 다시 사랑을 생각한다 그 생각의 순환에 길들여진 심장이 마르지 않는 뜨거운 피를 온몸으로 순환시키며 그의 가슴에 남은 찬 서리를 녹여 버린다 그러다 한때 둘이서 팔짱 끼며 견디던 혹한의 바람이 불면 그는 잦은 기침을 하고 한 번의 기침을 할 때마다 패이던 ..

같은 하늘 다른 시간을 살고 간 두 천재 이야기_김삿갓 & 굴원/ 정숙자

같은 하늘 다른 시간을 살고 간 두 천재 이야기      - 김삿갓 & 굴원-       정숙자    1. 난고 김병연의 가족관계  生: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나고 자랐다. 조부는 평안도 선천부사 김익순, 아버지는 김안근, 어머니는 함평 이씨, 형 김병하와 동생 김병두가 있었고. 부인은 장수 황씨, 자식으로는 장남 김학균과 차남 김익균, 삼남 김영규를 두었다.  死: 1863년 김병연이 56세로 전라도 동복 땅(지금의 화순)에서 객사했다. 행려병자로 연고 없이 사망한 이들을 묻는 ‘똥뫼’라는 곳에 묻혔지만, 3년 뒤 아들 김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 장사 지냈다.  後: 김삿갓 유적보존회 구성, 『(천재적인)김삿갓의 (문학적) 유산』(1992)발간.    2. 조부 선천부사 김익순으로부터 시작된  ..

그 집이 있다/ 임태성

그 집이 있다 임태성 아무리 멀리 갔어도 되돌아오던 집, 내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데 왜 이렇게 멀어졌나 지금은 쓸쓸해진 어머니의 집 어머니는 오늘도 동구 밖을 서성이고 있다 보고잡다, 말해 뭐하겠노, 눈물 나지 자식이 떠난 바다는 적막하다 전화는 기다리는 사람이 먼저 한다 딱히 할 말은 없다 고맙다, 막둥아, 건강해레이 자식들 전화 한 통은 귀하고 귀하다 밥이다 아무 것도 아닌데 배가 부르다 나 살아온 걸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고생한 기억은 사라져도 자식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그립다 바로 오늘이다 아들이 오는 날 저녁 해가 떨어지는데 동구 밖은 아직 조용하다 너무 일찍 준비한 밥상의 밥은 이미 식었다 지나가는 발소리가 모두 아들 같은데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달은 높이 떠서 마을 밖을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