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한 상자 외 1편
권현형
사물이 있던 자리의 잔상은
빛을 받고 있어도 가파르게 어둡다
난간 위의 햇볕과 난간 위의 물방울은
연설과 웅변으로 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놓쳐버리기 쉬운 이정표들은
들어가도, 들어가도 거울 속이다
평생 쓸 수 있는 햇볕이 그곳에 모여 있다
베어진 마음, 베어진 언어들의 씨앗이 먼 곳으로 날아가
맨드라미로 채송화로 피어 있다
오래 불행한 사람, 병이 깊은 사람은
자신을 감자 싹 도려내듯 파내버린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파내버리지 않겠다
부적 삼아 지도 삼아
늘 상자에 담은 시를 안고 표류해 왔다
이정표를 놓친 즈므*에서도 시는 주근깨처럼 갖고 있었다
빛을 타고나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빛이 되어야 한다
-전문(p. 116-117)
* 즈므: 강릉의 큰길 안쪽에 숨어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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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나의 애플민트
내 식물도 대성당 크기의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애플민트와 여름 한 철 동거한 적 있다
귀한 새를 머리에 이고 다니듯 애착했더니
줄기가 부러졌다
잎은 있으나 뿌리는 없는 줄기와
뿌리는 있으나 상흔을 머리에 이고 있는 줄기를
유리병에 함께 꽂아 두고 날마다 물을 갈아 주었다
간절한 발은 기어코 걷는다
맨몸에서 뿌리가 생긴다
부러진 자국을 감출 길 없었던 줄기에서
잎사귀가 조그맣게 돋아나더니 며칠 만에 넓적해져
제 잎사귀로 상처를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선으로만 이루어진 식물의 몸이
어떻게 분열했고 복원되었는지
정신분석하기 어렵다, 몸이 갈라지면서
이명을 앓았을지도 모른다
알프스 산악 지대의 대규모 빙하가
녹아내릴 수 있다는 소식을 새벽에 듣는다
21세기 뉴스는 이토록 잠언적이다
식물의 트라우마는 이토록 잠언적이다
짧은 여름, 전력을 다해 살아 있는 식물을 존경한다
-전문(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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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아마도 빛은 위로』 에서/ 2023. 12. 12. <여우난골> 펴냄
* 권현형/ 강원 주문징 출생,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밥이나 먹자, 꽃아』『포옹의 방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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